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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고종대에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북문인 신무문(神武門) 북쪽에 넓은 공간을 확보하고 그곳을 경무대라 하였다. 중심 전각은 융문당(隆文堂)과 융무당(隆武堂)이다. 경무대는 융문당, 융무당과 함께 경복궁 중건 공사가 거의 마무리된 1868년(고종 5) 9월에 조성되었다.
[위치 및 용도]
경복궁 후원의 중앙 부분에 위치하며 훤하게 트인 지형이다. 이곳에서 왕이 친림하는 최종 시험인 문무전시(文武殿試)를 시행하거나 망배례(望拜禮) 등을 행하였다. 행사에 참석하는 종친과 관료, 유생과 군인 등은 서쪽의 문인 추성문(秋成門)으로 출입하였다.
[변천 및 현황]
경복궁 신무문 북쪽은 원래 경복궁 궁역 밖이었지만 고종대 이전에는 민간의 출입이 통제되었다. 이곳에는 신하가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회맹제(會盟祭)를 치르는 회맹단이 있었다. 숙종대에 회맹제를 하기 위하여 나아갈 때 경복궁에 들렀는데 이때 김수항(金壽恒)이 “경복궁의 북문 밖은 바로 회맹단으로 삼청동에서 멀지 않아 경치가 좋은데도 후원에 들어 있지 않다.”고 한 사실을 보면, 이 일대는 조선후기에도 경복궁 후원의 범위 밖이었음을 알 수 있다[『숙종실록』 6년 8월 28일].
고종대에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창덕궁 후원의 춘당대(春塘臺)처럼 경복궁의 북쪽 일대를 과거시험과 군대 사열, 휴식을 위한 공간 등으로 만들었는데 그 중심 지역이 바로 경무대였다. 현재는 청와대의 영역이다.
[관련사건 및 일화]
1873년(고종 10) 고종은 즉위 10년의 친정 실시를 전후하여 경무대에서 문과와 무과의 정시(庭試), 전시(殿試)를 개최하고 합격한 유생의 전강(殿講)에 친림하며 왕실 종친을 위한 행사를 열었다[『고종실록』 10년 8월 19일]. 일례로 1871년(고종 8) 경무대에서 대종회(大宗會)를 개최하여 선파유생(璿派儒生)을 대상으로 응제(應製)를 실시하여 100명을 선발하였다[『고종실록』 8년 3월 20일]. 이러한 행사는 고종이 자신의 권한을 확대해 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던 행사라고 볼 수 있다.
1885년(고종 22) 이후에는 융무당에서 시사(試射)나 군영의 조련에 친림하는 횟수가 증가하여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이전까지 지속적으로 시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