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감리서(監理署)

서지사항
항목명감리서(監理署)
용어구분전문주석
관련어개항(開港), 개항장(開港場), 거류지(居留地), 무역(貿易), 통상(通商), 관세(關稅), 인천감리서(仁川監理署), 부산감리서(釜山監理署), 원산감리서(元山監理署)
분야정치
유형집단 기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1876년 개항 이후 개항장의 통상사무와 외국인 거류지를 관리하기 위해 설치한 부서.

[개설]
1876년(고종 13) 조선 정부는 강화도조약 이후 부산, 원산, 인천의 세 항구를 조약에 따라 개항하였고, 이후 청국과 러시아 등과의 조약에 따라 주요 항구와 요충지가 추가로 개방되었다. 이에 따라 개항장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많아지고 무역량이 증가하자 거류지 관계 사무와 통상 사무 등을 전담, 처리할 기관이 필요하게 되어 감리서가 설치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감리서는 1883년 9월 인천, 부산, 원산의 개항장에 처음 설치되었다. 1889년에는 청나라 및 러시아와의 육로 통상사무를 처리하기 위하여 경흥, 회령, 의주의 개항장에도 설치하였다. 감리서 설치 초기에는 해당 지역의 부사가 감리를 겸임하고 기존의 행정체계에서 업무를 처리하였다. 그러나 외국인의 도래가 증가하고 무역이 활발해지자 개항장 사무가 늘어나 1892년 직원을 따로 파견하여, 독립된 관서로 기능하였다.

감리서는 외국 영사와의 교섭, 외국인 조계지의 각종 사무, 개항장에서의 상품수출입과 세액을 결정하면서 탁지부와 외부에 보고하는 관세업무, 거류지 내의 외국인과 왕래하는 조선 상인의 보호, 개항장의 치안질서 유지 등 개항장 내 모든 사무를 전담하여 처리하였다.

[조직 및 역할]
1899년(광무 3) 5월 4일 반포된 칙령 제15호의 각항시장감리서관제급규칙(各港市場監理署官制及規則)에 실린 감리서 조직과 역할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각지의 항시장(港市場)에 감리서를 둔다. 2) 감리서 직원은 주임관 감리 1인, 주임 4인, 주사(主事) 2~3인이다. 3) 감리는 외부대신이 상주한 것을 임명하고, 외부대신의 지휘 감독을 받으며, 각국 영사의 교섭과 개항장의 일체 사무를 관장한다. 4) 감리서 주사는 감리가 자벽(自辟)하여 외부대신에게 보고하여 임용을 요청한 뒤 임용한다. 5) 경비는 외부대신이 탁지부 대신과 협상하여 수시로 조절하되 의정부에 경의(經議) 시행한다. 6) 감리는 개항장의 시장(市長), 경무관(警務官) 이하 관리를 지휘 감독한다. 7) 감리는 관찰사와 동등한 지위로 상하 없이 서로를 대하고 대등한 관계로 상호 간의 일을 처리하며, 목사, 부윤, 군수와 개항장의 시장, 경무관에게는 훈령 지령한다. 8) 감리가 각 부부(府部)에 관한 사건은 해당 부부(府部)에 직접 보고하되 해당 사건을 외부(外部)에도 보고한다. 9) 감리는 거래 물품 내역과 세금의 정도를 매월 말에 탁지부에 보고하되 외부에도 모든 내용을 알린다. 10) 감리서의 봉급, 수당과 추가 경비는 해당 개항장에서 거둔 세금으로 충당했다. 이때 전국에 인가된 10개의 감리서와 그 위치는 다음과 같다. 인천감리서-제물포, 동래감리서-부산, 덕원감리서(德源監理署)-원산, 경흥감리서(慶興監理署)-경흥, 무안감리서(務安監理署)-목포, 삼화감리서(三和監理署)-증남포(甑南浦), 옥구감리서(沃構監理署)-군산항, 창원감리서-마산항, 성진감리서(城津監理署)-성진, 평양감리서-평양 등이다[『고종실록』 36년 5월 4일].

1904년(광무 8) 12월 12일 칙령 제31호의 각 항구 시장 감리서 관제에 따라 용천감리서(龍川監理署)-용암포(龍巖浦), 의주감리서(義州監理署)-의주가 추가되어 12개의 감리서가 되었다. 용천과 용암포는 1904년 칙령 제14호로 항시장(港市場)이 설치되었기 때문이다[『고종실록』 41년 12월 12일].

감리서는 개항장의 사무를 전담하는 것이 주 임무였으나, 해당 지역의 치안과 행정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1894년(고종 31) 동학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는 감리서 소속 순사가 파견되어 동향을 파악해 보고했다. 앞서 1893년(고종 30) 6월 14일에는 인천부의 이교민병(吏校兵民) 수백 명이 작당하여 인천감리서에 느닷없이 쳐들어와 관원들을 구타하여 중상을 입은 자가 16명이었다. 동일한 시기 부산감리서에서는 전라도 흥양현(현 고흥군 고흥읍) 황제도(黃提島)와 낙안군(樂安郡) 열도(尖島)에서 발생한 일본 어민 타살 사건의 해결을 위해 감리서 주사와 서리 등이 일본 군함 고웅호(高雄號)를 타고 가서 조사했다. 감리서는 후기로 갈수록 친일적 양상을 보였다. 1906년 9월 4일 의주감리서는 의병 박양래(朴樑來), 전덕원(全德元) 등을 체포하여 일본인 순사에게 인도해 경성으로 압송하게 했다.

[변천]
1894년(고종 31) 9월 14일 경흥감리서에 사무가 많지 않아서 방판(幫辦), 장부(掌簿), 서기관(書記官) 등의 수를 줄였다. 1895년 5월 26일에는 칙령 제99호에 따라 윤5월 1일 인천항, 부산항, 원산항의 감리서가 폐지되었다[『고종실록』 32년 5월 26일]. 1906년(광무 10)에는 칙령 제47호로 항시(港市)의 감리가 폐지되었다[『고종실록』 43년 10월 1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대한제국관보(大韓帝國官報)』
■ 『통감부문서(統監府文書)』
■ 『주한일본공사관일기(駐韓日本公使館日記)』

■ [집필자] 정욱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