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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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兵營)

서지사항
항목명병영(兵營)
용어구분전문주석
동의어병마도절제사영(兵馬都節制使營),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 내상(內相)
관련어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진관(鎭管) 체제(體制), 영장(營將), 주진(主鎭), 행영(行營)
분야정치
유형집단 기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에 각 도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가 주둔한 군영(軍營).

[개설]
고려시대 말엽에 왜구를 막기 위하여 각 도에 도순문사(都巡問使)를 파견하면서 지방에 병영이 설치되기 시작하였다. 도순문사는 조선 건국 직전에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로, 이어서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개칭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병영의 기구도 정비되었다. 따라서 병영의 정식 명칭은 병마도절제사영(兵馬都節制使營) 또는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전임(專任) 병마도절제사와 병마절도사 휘하에만 설치되었다. 전임 병마도절제사나 병마절도사를 고정적으로 둔 곳은 북방의 평안도와 함경도, 남방의 경상도와 전라도, 충청도 등 5개 도였다.

각 도의 병영은 도별 국방 체제와의 긴밀한 연관 아래 설치되었다. 북쪽에서 강력한 적이 침입할 것에 대비하여 방위 체제를 운영하던 북방의 두 도에서는 서울로 이어지는 교통 요충지에, 왜구 방어에 초점을 맞춘 남방의 세 도에서는 해안 지역이나 해안에서 가까운 곳에 병영을 설치하였다. 4군 6진의 개척으로 여진족의 침입이 빈번해져 국경 방어가 중요해진 북방 지역에는 행영(行營)이 설치되어 운영되기도 하였다. 병영에는 병마절도사의 참모부를 구성하는 기구와 노비, 공장(工匠), 직속 병력 등이 배치되어 있었다.

진관(鎭管) 체제(體制)가 시행되면서 병영은 주진(主鎭)으로 규정되어, 휘하의 거진(巨鎭)제진(諸鎭)을 통할하여 도별 방위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후 임진왜란을 통해 일본 쪽에서의 적침으로도 정권이 무너질 수 있다는 교훈을 얻은 뒤 일부 병영의 이전이 이루어졌고, 진관 체제를 보완하기 위하여 수령이 겸임하는 거진의 진장을 대체하여 영장(營將)을 둠에 따라 병영에서 영장의 군영으로 이어지는 지휘 계통이 새로 형성되었다. 병영은 갑오개혁 후 새로운 지방군 제도가 시행되면서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4세기 후반에 왜구의 침입이 심해지자 고려 조정에서는 각 도의 지방군을 체계적으로 지휘하여 대처하기 위해 도순문사를 파견하였고, 경상도 합포(合浦) 등지에 도순문사영을 설치하였다. 그 뒤 차츰 북방 지역에도 도순문사를 파견하였는데, 이들은 뒷날의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와 같이 도내의 행정 관할과 감찰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군사도 지휘하였다. 경상도와 전라도, 충청도에 파견되던 도순문사는 1388년(고려 창왕 즉위)부터 도절제사(都節制使)로 개칭되었으며, 1389년(고려 공양왕 1)에는 전임 직책으로 바뀌었다. 조선 건국 후에는 한때 폐지되었다가 1398년(태조 7)에 다시 설치되었는데, 이때 참모부와 공장 등으로 구성된 병영의 기구도 규정되었다. 도절제사는 각 도에 수군이 조직되면서 직함이 병마도절제사로 변경되었다. 또한 이전에는 서북면(西北面)과 동북면(東北面)에 겸임 도절제사를 파견하였으나 1417년(태종 17)부터는 전임 병마도절제사를 두었으며, 지역의 명칭도 평안도와 영길도(永吉道)로 변경하였다.

병마도절제사는 세종~세조 연간에 몇 차례 변동을 거쳐 1466년(세조 12)에 병마절도사로 개칭되어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수록되었는데, 그 기간 동안 전국의 국방 체제도 군익도(軍翼道) 체제를 거쳐 진관 체제로 바뀌었다. 이로부터 병영이 주진으로서 휘하의 거진과 제진을 지휘하여 국방을 담당하는 체제가 갖추어졌다. 병영은 전임직(專任職)으로 임명되는 병마절도사의 주둔지에만 설치하였고, 전임직 병마절도사가 없는 경기도와 황해도, 강원도의 경우 겸병마절도사(兼兵馬節度使)인 관찰사의 감영(監營) 소재지에 병영 기구를 설치하여 주진으로 기능하도록 하였다. 한편 도내에 2명의 전임직 병마절도사가 임명된 함경도와 경상도에는 각각 2개의 병영이 설치되었으며, 함경도는 북도와 남도, 경상도는 좌도와 우도로 나누어 각각 병마절도사의 군사도(軍事道)를 이루도록 하였다.

각 도의 병영 소재지는 시기에 따라 변동이 많았다. 충청도의 병영 소재지는 이산(伊山)에서 이산과 합덕(合德)이 합쳐진 덕산(德山)을 거쳐 해미(海美)로 정해졌다. 경상도의 경우 계림안동도(鷄林安東道)와 상주진주도(尙州晉州道)로 나뉘었다가 합도(合道)된 뒤 다시 좌도(左道)와 우도(右道)로 나뉘어 좌도는 울산(蔚山), 우도는 창원(昌原)으로 고정되었다. 창원은 합포에서 바뀐 명칭으로, 합도 때는 이곳에만 병영을 설치하였다. 전라도의 병영은 광주(光州)에서 나주(羅州)를 거쳐 도강(道康)으로 이전되었는데, 도강이 탐진(耽津)과 합쳐져 강진(康津)으로 지명이 바뀌었다. 평안도의 병영은 안주(安州)에서 영변(寧邊)으로 이전되었는데, 이는 여진족 세력의 중심지인 건주위(建州衛)가 만포의 북쪽에 위치하여서 이들이 침입할 때 의주(義州)를 거치는 경로보다 만포(滿浦)와 강계(江界)를 지나는 경로를 택할 것으로 예상한 데 따른 결과였다. 영길도, 함길도(咸吉道), 영안도(永安道) 등으로 여러 차례 도명이 바뀐 함경도에는 경성(鏡城)과 북청(北靑)에 각각 북병영과 남병영이 있었고, 함경북도병마절도사 휘하에는 고정적으로 행영이 소속되었는데 그 위치는 종성(鍾城)이었다.

[조직 및 기능]
병영은 각 도의 군사 요충지에 위치한 큰 고을에 설치되었고, 요새화된 성곽 안에 병마절도사의 하부 기구가 갖추어져 있었다. 병영에는 병마절도사 외에도 참모장인 우후(虞候)와 참모로 일하는 각급 군관(軍官) 및 진무(鎭撫) 등의 장교가 있었는데, 병마절도사의 기구와 우후의 기구가 별도로 구성되어 있었다. 또한 병영에는 수백 명의 직속 병력이 배치되었는데, 영리(營吏)를 비롯한 아전(衙前)·공장·노비 등도 수백 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이처럼 병영은 방대한 기구를 통해 각 도의 육군 사령부로서 도내 군사를 지휘하고 군사 행정을 총괄한 까닭에 그 재정을 유지하기 위하여 다량의 둔전(屯田)을 경영하였다. 그런데 특히 조선후기에는 막대한 환곡(還穀)을 운영함으로써 커다란 폐단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 밖에 평안도와 함경도에는 적침이 우려되는 시기에 군사적인 필요에 따라 병마절도사가 병력을 이끌고 최전방에 나가 주둔하는 이동 사령부로서 행영이 설치·운영되었는데, 뒤에는 함경북도병마절도사 휘하에만 남게 되었다. 병마절도사의 문관 참모인 평사(評事)는 평안도와 함경북도 병영에만 소속되어 있었다. 황해도와 강원도에는 도내에 육군이 소속되어 있었던 까닭에 관찰사가 겸임하는 병마절도사에 딸린 병영에 직속 병력이 있었으나 『경국대전』 편찬 과정에서 제외되었고, 경기도에는 도내에 육군이 없어서 관찰사가 겸하는 병마절도사직은 형식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병영이 이전하게 되면 역참과 봉화대도 옮겨져 교통로와 통신망도 아울러 재편되었다. 긴급한 군사 정보는 먼저 병영으로 전달되고, 이어서 서울에도 전달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유사시에는 근무할 차례가 아니어서 고향에 머물고 있는 중앙군 병력을 포함하여 도내의 모든 육군 병력이 병영의 지휘를 받았으나, 평상시에는 유방군(留防軍)이라 하여 상주하는 병력이 배치된 제진만이 그 지휘를 받았다. 또한 도내의 군사훈련과 군장 검사, 거진과 제진이 보관하고 있는 무기의 점검 등이 병영에서 담당하는 주요 업무였다.

[변천]
1555년(명종 10) 무렵부터 일종의 분군법(分軍法)으로서 제승방략(制勝方略)이 시행되면서 지방군에 대한 지휘권이 병마절도사를 벗어나 비변사(備邊司)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 정부에 예속되자 병영의 기능은 크게 약화되었다. 이후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그에 대한 반성으로 진관 체제를 복구하려는 노력이 계속되는 가운데 속오군(束伍軍)을 설치하고 그 지휘를 위해 영장(營將)을 둠으로써 병영의 기능은 어느 정도 살아나게 되었다. 그러나 병자호란 이후 상당 기간 동안 북방의 군사 기능이 사실상 마비됨으로써 병영의 기능도 퇴화하였다. 조선후기에는 충청도의 병영은 청주(淸州)로 옮겼는데 이는 청주가 호서와 영남의 교차 지점에 위치해 있어 전략상 중요성이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경상우도의 병영은 진주(晋州)로 이전하였는데, 이는 경상도 해안 지역에서 서울과 전라도 지역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충지에 대한 방어를 강화하려는 조치였다. 황해도에는 황주(黃州)에 병영이 설치되었고, 평안도의 병영은 안주(安州)로 이전되었는데, 이는 병자호란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 조치였다.

조선후기를 거치는 동안 문관 병마절도사가 자주 임명되고, 겸임 병마절도사인 관찰사와 전임직 병마절도사 사이에서 지휘 계통의 혼란이 심해짐에 따라 병영의 기능은 점차 퇴화했다. 개항 후 이미 병영의 기능이 유명무실해진 상황에서 1895년(고종 32)에 도제(道制)가 폐지되고, 이어서 1896년에 지방에도 신식 군제가 채택되어 진위대(鎭衛隊)가 편성되면서 병마절도사가 폐지되었다. 그에 따라 병영도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여지도서(輿地圖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오종록, 「고려말의 도순문사 - 하삼도 도순문사를 중심으로」, 『진단학보』62, 1986.
■ 오종록, 「조선초기의 병마절도사제의 성립과 운용(上, 下)」, 『진단학보』59, 60, 1985.
■ 이강길, 「조선후기의 충청병영」, 『실학사상연구』27, 2004.
■ 장병인, 「조선초기의 병마절도사」, 『한국학보』34, 1984.

■ [집필자] 오종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