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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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대(墩臺)

서지사항
항목명돈대(墩臺)
용어구분용어용례
관련어망루(望樓), 포루(砲樓), 공심돈(空心墩)
분야정치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성벽 위에 석재 또는 벽돌로 쌓아 올려 망루(望樓)와 포루(砲樓)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누대(樓臺).

[내용]
돈대의 형태는 원형과 방형 두 가지가 있으며, 내부에는 2~3단의 마루를 만들고 외부를 향한 벽면에 각 층마다 작은 안혈(眼穴)을 내어 대포·총·화살을 쏠 수 있도록 하였다. 돈대 설치의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곳곳에서 나타난다. 1679년(숙종 5) 병조 판서 김석주(金錫冑)의 건의에 따라 강화에 48개소의 돈대가 설치되었는데, 『여지도서』에 그 명칭과 함께 위치가 그려져 있다. 1796년 완공된 수원성 성곽의 서북·남·동북의 세 곳에 돈대가 설치되었는데, 이를 공심돈(空心墩)이라 불렀으며, 수원성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시설물이다. 현재는 서북 공심돈만이 남아 있다. 이러한 공심돈은 서양 중세 봉건제후 성의 일부인 탑과 유사한데 수원성 성역에 참여했던 정약용이 「기기도설(奇器圖說)」을 연구한 것으로 미루어 서양 성곽을 본뜬 것으로 짐작된다.

[용례]
黃監軍還島 回帖曰 (중략) 乘此時而選將練卒 每三十里 建一亭障‧墩臺 撥兵分戍 火藥‧砲銃‧盔甲‧器械 製造犀利 奴賊不敢東向 而窺左足[『인조실록』 14년 10월 24일]

[참고문헌]
■ 배성수, 「肅宗初 江華島 墩臺의 축조와 그 의의」, 『朝鮮時代史學報』27, 2003.
■ 이민웅, 「18세기 강화도 수비체제의 강화」, 『韓國史論』34,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1995.
■ 池均晩, 「17세기 강화 墩臺 축조에 관한 건축사적 연구」, 경기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4.

■ [집필자] 김종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