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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후기에 각 군영과 감·병영에 속하여 주장(主將)의 명령을 하달하고, 군병의 조련 등을 담당하던 장교.
[개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에서 조선군은 육지에서는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하지 못해 도성과 평양성 등이 함락되고, 왕은 의주까지 도망을 갔다. 그러다가 1593년 1월 평양성을 탈환한 후 정부는 평양성 전투에서 일본군을 물리치는 데에 효용성이 입증된 명(明)나라의 『기효신서(紀效新書)』 병법을 도입하여 1593년 훈련도감과 1594년 속오군을 창설하였는데, 기패관도 이때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기패관은 중앙군과 지방군에 확대 설치되었다.
기패관은 주장의 명령을 하달하고 군병을 조련하였으며, 입직하여 궁궐을 지키거나 능행(陵幸) 때 어가를 호위하고, 왕릉의 개수(改修)·성의 수축 등을 감독했다. 이러한 임무를 잘 수행한 기패관에게는 쌀[米]·무명[木]을 상으로 주거나 품계를 올려주거나[加資] 변장(邊將)에 제수하는 등의 상을 내려 주었다. 그러나 숙직했던 건물이 부주의로 불이 나서 타는 등 잘못이 발생하면 기패관은 곤장을 맞고 파직되는 등 처벌도 받았다.
기패관은 군영의 설치와 폐지에 따라 소속과 군병 수 등에 변화가 있었는데,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에 이어 1895년 을미개혁으로 조선후기 군대가 모두 폐지되는 가운데 함께 혁파되었다.
[담당 직무]
기패관은 『대전회통』에 의하면 중앙군에는 ‘훈련도감에 20명, 금위영에 10명, 어영청에 11명, 총융청에 2명, 수어청에 19명, 경리청에 5명, 진무영에 71명’ 등이, 『여지도서』에 의하면 지방군에는 충청도 감영에 64명과 병영에 69명 등 8도에->팔도에 고루 설치되었다. 기패관은 출신(出身)·전함(前銜)·한량(閑良)·항오(行伍)를 막론하고 사(射)·강(講)·진(陣)을 시험 보아 선발하였다.
중앙군의 기패관은 매달 참상(參上)의 경우 쌀[米] 12두·전미(田米) 4두·태(太) 9두를 지급받았으며, 참하(參下)의 경우 미 9두·전미 2두·태 6두를 지급받았다. 『만기요람』에 의하면 7품 이하 기패관의 경우 훈련도감은 20개월 그리고 금위영·어영청은 24개월을 근무한 후 6품으로 승급하였다.
기패관은 우선 주장의 명령을 하달하고, 군병의 조련을 담당하였다. 그 점은 1598년 명나라의 기패관 주충(朱忠)이 임진왜란 당시 전쟁을 감독하고 격려하는 일로 영기(令旗)를 가지고 주사(舟師)의 진영에 가서 적이 탈출하지 못하게 명나라 장수 도독(都督) 진린(陳璘)을 경계한 것이나, 일본군을 물리치기 위해 『기효신서』의 병법이 도입되어 새로운 진법(陣法)·기치(旗幟)·조총 등에 대한 교련이 필요하였다는 데서 잘 알 수 있다. 더욱이 인조대 후금과의 전쟁 위험이 고조되면서 보전(步戰) 위주의 일본군과 달리 말을 타고 싸움을 벌이는 후금(청)을 상대하기 위해, 『연병실기(鍊兵實記)』의 병법 교육도 필요하였다. 때문에 군사 지휘관의 군병 조련이 더욱 어려워졌고 군병 조련을 주관하는 기패관의 역할이 더욱 강조되었다. 그러한 사실은 1625년(인조 3) 특진관(特進官) 이서(李曙)가 수령·장관이 조련을 제대로 못 시키므로 훈련도감의 기패관을 도회소(都會所)에 보내자고 한 것이나, 1628년 병조(兵曹)가 당시 장관(將官)이나 병마절도사·수군절도사가 진법을 알지 못해 행군하거나 진을 칠 때 기패관의 입만 쳐다보고 있는 실정이라고 지적한 것 등에서 잘 나타난다[『인조실록』6년 9월 29일].
기패관은 평시에 입직(入直)하여 궁궐을 지키고, 왕의 온천행(溫泉幸)이나 능행(陵幸) 때 어가를 호위하거나 반대로 유도군(留都軍)에 편성되어 도성의 방어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기패관은 화약[焰硝]이나 조총을 구입하거나 1728년(영조 4) 무신란(戊申亂), 1811년(순조 11) 홍경래의 난을 진압하는 데 참여하였다[『순조실록』12년 6월 9일].
‘왕릉·궁궐 담장의 개수, 북한산성·화성의 수축, 준천(濬川), 군기(軍器)의 제작’ 때 작업을 감독하기도 하였다. 그 밖에 기패관은 장용영 외영(外營)의 파수(把守), 함부로 국경을 넘은 죄인[越境罪人]의 체포, 호랑이 포획, 황해도 대청도·소청도 둔전의 감독을 맡기도 하였고, 세자의 행차 때 배종(陪從)하거나 1729년 세자의 발인 때 장막꾼을 통솔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임무를 잘 수행한 기패관에게는 쌀·무명·동개(筒箇)·활과 화살·말 등을 상으로 주었으며 품계를 올려주거나 변장에 제수하기도 하였다. 활쏘기 시험을 통해서도 쌀이나 포(布)를 상으로 주거나, 또는 품계를 올려 주거나 과거 시험의 최종 시험인 전시(殿試)에 곧바로 응시할 수 있는 자격[直赴殿試] 등을 혜택으로 주어 노고를 위로하였다. 하지만 사용할 수 없는 조총을 구매하거나 숙직했던 건물이 부주의로 불이 나서 타는 등 잘못이 발생하면 기패관은 곤장을 맞고 파직되는 등 처벌도 받았다.
[변천]
기패관은 1593년(선조 26) 평양성 전투에서 승리한 후 명나라의 『기효신서』 병법을 도입하여 일본군을 격퇴하기 위해, 1593년 중앙에 훈련도감과 1594년 지방에 속오군을 창설할 때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평안도 속오군 군안으로 1596년 작성된 『진관관병편오책(鎭管官兵編伍冊)』에 출신(出身) 7명, 수문장 2명, 정병(正兵) 3명으로 구성된 기패관 12명이 안주·영변·구성·의주의 진관(鎭管)에 각각 3명씩 배속된 것이 확인된다. 그 후 기패관은 조선 후기 군대에 확대 설치되었다.
먼저 중앙군의 경우 기패관은 1746년(영조 22) 편찬된 『속대전』에 비해 1865년(고종 2) 편찬된 『대전회통』에서는, 금위영은 2명 줄었으나 ‘어영청에 1명, 총융청에 2명, 수어청에 11명’이 증가하였다. 아울러 교련관과 기패관이 함께 배속된 군영은 기패관과 교련관이 한 묶음으로 운용되었고, 정조대 장용영 설치와 1802년(순조 2) 장용영 폐지 등과 관련하여 충원에 변화가 생겼다. 한 예로 금위영의 경우 영조대 『속대전』의 기패관 12명과 교련관 15명은 ‘천총 소속 2명, 금군 5명, 행오승차(行伍陞差) 4명, 출신 7명, 전함(前銜)이나 한산(閑散) 9명’으로 구성되었는데, 1785년(정조 9) 편찬된 『대전통편』에서는 기패관 2명과 교련관 3명이 줄면서 ‘천총 소속 2명, 금군 5명→3명, 행오승차 4명→5명, 출신 7명 없앰, 장용위 1명 및 장용위 패두(牌頭)나 어영청이 교대로 차정하는 1명 신설, 전함(前銜)·한산(閑散) 9명→11명’으로 변화하였다. 이어 1802년 장용영이 혁파된 후 장용위와 관련되었던 2명을 무예별감(武藝別監)에서 충원하였고, 행오승차 기패관을 1명 늘리는 대신 한산을 1명 축소시켰다.
지방군의 경우 1596년 평안도 안주·영변·구성·의주의 진관에 각각 3명의 기패관이 배속된 후, 1712년(숙종 35) 감영·병영·수영 이하의 기패관은 35명을 정원으로 하되 전선(戰船)이 있는 곳은 전선 1척마다 5명을 배속하도록 하였다. 1757년(영조 33)부터 1765년에 편찬된 『여지도서』에 의하면 충청도 육군의 기패관은 ‘감영에 64명, 병영에 69명, 홍주진에 60명, 해미진에 56명, 청주진에 58명, 공주진에 60명, 충원(충주)진에 60명’이었고, 수군은 ‘수영에 155명, 평신진에 10명, 마량진에 10명, 안흥진에 10명, 소근진에 10명, 서천포진에 5명’이었다. 따라서 충청도 육군이 수군에 비해 규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군역의 기피와도 관련이 있다.
즉 1725년(영조 1) 중인·서얼이 담당하던 기패관에 부유한 백성들이 들어오고[『영조실록』1년 3월 12일], 1735년 수원 백성들은 한 번 기패관을 지내면 자손들이 모두 군역을 면제받으므로 부유한 한정(閑丁)들이 기패관이 되려고 하며, 1779년(정조 3) 기패관과 제번(除番)군관(軍官)은 큰 고을은 7백여 명에 가깝고 작은 고을도 3~4백 명이 넘는다는 지적 등에서 그러한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때문에 기패관에게 활쏘기나 경전의 강(講)을 시험하여 불합격하면 기패관에서 제외시키고 군역을 부과하며, 진휼곡(賑恤穀)을 모으기 위해 기패관 첩지(帖紙)를 파는 것도 금지하도록 하였다. 또한 17세기 반계 유형원은 사무가 있을 때만 복무하는 지방 기패관에게도 정월·사월·칠월·시월에 각각 약 10말[斗]에 해당하는 3곡(斛)의 녹봉을 지급함으로써 군역 복무를 하러 온 군인들을 돌려보내고 그 대가로 포를 받는 방군수포(放軍收布)로 인한 군사력 약화와 군포 부담으로 인한 군역민의 몰락을 방지하자고 주장한 바 있다.
한편 1894년 갑오개혁에 이어 1895년 을미개혁으로 조선후기 중앙군·지방군이 모두 폐지되는 가운데 기패관도 혁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