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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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篆字)

서지사항
항목명전자(篆字)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서체(書體), 자체(字體)
하위어구첩전(九疊篆), 무전(繆篆), 상방대전(上方大篆), 소전(小篆), 지영전(芝英篆), 진전(秦篆)
동의어전서(篆書)
관련어계회도(契會圖), 『보전서사관(寶篆書寫官), 비액(碑額), 원목부(圓木符), 전대학(篆大學)』, 전액(篆額), 『전운편람(篆韻便覽)』, 전자관(篆字官), 『전중용(篆中庸)』, 『전해심경(篆海心鏡)』
분야교육 출판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예서(隸書) 이전 고대 한자 서체의 통칭.

[개설]
전자(篆字)는 크게 대전(大篆)과 소전(小篆)으로 나뉜다. 소전은 전서의 일종으로 진전(秦篆)이라고도 하며, 대전과는 상대 개념이다. 진나라 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하고 승상 이사(李斯)로 하여금 만들게 하였다고 전한다. 소전을 만들 당시에 진나라의 문자를 중심으로 여기에 합치되지 않는 다른 나라의 문자들은 모두 폐지하였다. 소전은 이전의 문자에 비해 균일하며 이상적인 형태로 나타나는데 제왕의 냉엄한 권위를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와 시황제의 자긍심이 담긴 서체로 인식된다.

이후 한대(漢代)로 넘어와 예서(隸書)의 시대에도 전서(篆書)는 인장(印章)과 비액(碑額)에 쓰이는 공식적 서체로 남았고, 이러한 전통은 이후로도 변함이 없었다. 대전은 정제되지 않고 불안정한 모양이 많고 유동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반면, 소전은 글자 모양이 세로로 길고 좌우로 대칭을 이루며 움직임이 거의 없는 정적인 글씨로 엄숙하면서도 긴장감을 준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에 전자가 쓰인 용례는 크게 인장과 비액에서 볼 수 있다. 전서가 상용되던 진나라 이후 예서의 시대인 한나라에 들어서도 인장과 비액에 전서를 쓰는 전통만은 그대로 살아남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는 전자가 다른 서체에 비해 비교적 복잡하여 모조하기 쉽지 않다는 이유도 있지만, 문자가 균일하며 이상적인 형태로 냉엄한 권위를 상징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인장에 쓰인 전서는 대부분 구첩전(九疊篆)이다. 명나라에서 반사(頒賜) 받은 3과의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 그리고 조선초기에 제작된 국왕 문서용 어보들 또한 모두 구첩전으로 제작되었다. 조선시대 새보(璽寶)의 글자가 의도적으로 9획을 사용한 이유는 『주역』에 나오는 ‘건원용구(乾元用九)’의 의미를 인장에 함축한 것이다.

중원에 청이 들어서면서 조선에서는 모두 3차에 걸쳐 국새를 인수하였다. 첫 번째는 1637년(인조 15) 11월 청자(淸字, 만주어)로 새긴 국새였다. 두 번째는 1653년(효종 4)에 인수하였으며, ‘조선국왕지인’을 한자와 청자로 하나의 인장에 새겨 넣었다. 한자는 소전이며 청자는 아직 전서화되지 않았다. 세 번째는 1776년(영조 52)에 인수하였으며, 한자와 청자가 모두 전서로 지영전(芝英篆)으로 하였음이 특징이다. 대한제국 시기에 들어 새보의 서체는 구첩전에서 소전으로 크게 바뀌었다. 기존에 중원에서 반사된 구불구불한 구첩전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의식이 담겨 있다고 여겨진다.

조선시대의 전자는 인장 외에도 다양한 용도에 사용되었다. 첫째 마패이다. 마패는 유자나무로 둥글게 만들어 한쪽에는 말 한 필에서 열 필까지의 숫자를 썼고, 다른 한쪽에는 전자로 ‘마(馬)’ 자를 새겼다. 둘째, 선패(宣牌)이다. 선패는 왕의 명령으로 3품 이상의 벼슬아치를 부를 때에 쓰는 나무패로 전자로 ‘선지(宣旨)’라고 새겼다. 1418년(세종 즉위)에 명패(命牌)로 개칭하였다.

셋째, 원목부(圓木符)이다. 원목부는 나무로 둥글게 만든 신부(信符)로 성문이 닫혔을 때 출입을 허가하는 물건이다. ‘신부(信符)’ 두 글자를 전자로 새겼고, 갑(甲)에서 계(癸)까지의 자호(字號)를 새긴 10개가 있었다. 또한 각종 행사의 기록화인 계회도의 표제도 전자로 쓰는 전통을 유지하였다.

왕실에서 전서를 쓰는 일은 도화서(圖畵署)의 한 벼슬인 전자관(篆字官)이 도맡았다. 전자관은 경서와 서적의 인쇄 및 반포와 향(香), 축문(祝文), 전자와 인장에 관한 일을 맡아 하였다. 세종대에는 인장과 비액에 사용되는 전자를 잘 쓰는 사람이 없어 이를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한 사례가 있었다.

1438년(세종 20) 의정부에서는 “교서관(校書館)에서 전자를 공부하는 법이 『육전(六典)』에 기재되어 있으나, 출척(黜陟)하는 제도가 없으므로 마음먹고 공부하지 아니하여, 도서 및 비갈(婢碣)의 전액(篆額)을 잘 쓰는 자가 적사오니 실로 염려스럽습니다.”라며, 매월 시험으로 인재를 뽑을 때 자학(字學)을 상등에 두고 전자에 매우 뛰어난 자는 차서를 가릴 것 없이 등용하였다.

[참고문헌]
■ 『전중용(篆中庸)』
■ 『전운편람(篆韻便覽)』
■ 『전대학(篆大學)』
■ 『전해심경(篆海心鏡)』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梁披雲 主編, 『中國書法大辭典』(영인본), 미술문화원, 1980.

■ [집필자] 성인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