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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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새(大韓國璽)

서지사항
항목명대한국새(大韓國璽)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국새(國璽), 새보(璽寶)
관련어고종(高宗), 국서(國書), 대한제국(大韓帝國), 황제(皇帝)
분야교육 출판
유형물품 도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1897년 9월 19일 제작된 대한제국의 공식 국새.

[개설]
대한국새(大韓國璽)는 대한제국 시기에 제작된 여러 새보(璽寶) 중에서도 대표적인 공식 국새이다. 조선시대에는 명(明)과 청(淸)에서 반사(頒賜)한 인장만을 국새로 한정하였는데, 대한제국의 경우에는 학자에 따라 견해 차이가 있다. 대한국새만을 대한제국의 공식 국새로 보자는 입장과 그 외의 내치용 새보까지 국새로 볼 수 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는 전통시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는 과도기로서의 대한제국 국새에 대한 해석의 차이라 볼 수 있다. 현재 대한민국의 국새는 고급 관료의 임명장에 사용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외교 문서에 국한하였으므로 시대별로 국새의 개념이 다르기 때문이다.

[연원 및 변천]
대한제국 이전 조선시대의 국새는 대부분 명·청의 황제들이 책봉과 동시에 내려 주었다. 1392년(태조 1)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고려의 국새를 명에 반납하고 새 국새를 내려주기를 여러 차례 요청하였으나 태조 당대에는 실현되지 않다가 태종대에 금제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을 받았다. 이 국새는 인조대까지 주로 명과의 외교 문서에 사용하다가 이후 두 차례 더 인수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이후에는 청나라에서 내려준 국새를 사용하였다.

1897년(고종 34)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환궁한 직후 일본의 위압으로 정한 건양(建陽)이란 연호를 광무(光武)로 변경하고, 10월 초에는 환구단(圜丘壇)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국명을 ‘대한’으로 변경하였다. 이로써 505년간 지속된 조선 왕조는 종언을 고하였다. 대한제국 이후에는 청나라와의 사대 관계를 종식함으로써 이전의 국새 인수 제도를 폐지하고, 황제국에 걸맞은 새로운 새보를 제작하였다.

이때 제작한 국새와 어보는 ‘대한국새’를 비롯하여, ‘황제지새(皇帝之璽)’·‘황제지보(皇帝之寶)’(3과)·‘칙명지보(勅命之寶)’(2과)·‘제고지보(制誥之寶)’·‘시명지보(施命之寶)’로 총 9과이다. 대한국새는 국서(國書), 황제지새는 훈기(勳記), 황제지보는 친임관칙지(親任官勅旨), 제고지보는 칙임관칙지(勅任官勅旨), 칙명지보는 주임관칙지(奏任官勅旨)·가자승륙칙지(加資陞六勅旨)·조칙(詔勅)에 사용하는 것으로 용도를 구분하였다.

이 외에 1899년(고종 36)에 군제 개편과 함께 ‘대원수보(大元帥寶)’와 ‘원수지보(元帥之寶)’를 제작하였다. 당시 원수부 규칙 제1편을 발표하면서 황제인 고종이 대원수로서 군기를 총람하고 육해군을 통령하며, 황태자가 원수로서 육해군을 일률적으로 통솔하게 되면서 제작한 것이다. 관보에 의하면 ‘원수부인(元帥符印)’과 각국의 인장도 함께 제작하였다.

기록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 외에도 ‘군주어새(君主御璽)’·‘황제어새(皇帝御璽)’라는 비밀 국새가 있었다. 그중 군주어새는 대한제국 선포 직전인 1897년 9월 프랑스와 독일에 양국의 우호 증진과 상호 협조를 구하는 내용의 친서에 찍혀 있으며,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유리 필름에 사진이 남아 있다. 황제어새는 고종황제가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됨에 따라 러시아·이탈리아 등 각국에 일본을 견제하고 대한제국의 지지를 요청하는 친서에 사용한 인장이다. 황제어새의 존재는 문서와 사진으로만 전해지고 있었는데, 2009년 3월 한 재미 교포로부터 국립고궁박물관이 구입하여 실물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대한제국 시기에 제작된 새보 중 일부는 한일 합방 당시 약탈당하여 일본궁내성에 보관되었다가 미군정이 인수하여 1946년 8월 15일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반환되었다. 그 후 1965년 3월 대한국새·황제육보 등 5점을 유실하였으며, 현재 남아 있는 국새는 최근 발견된 황제어새 1점뿐이다.

[형태]
대한제국 시기에 제작된 새보는 1과를 제외한 모든 국새의 손잡이가 거북에서 용으로 바뀌었고, 보문은 ‘인(印)’ 자에서 ‘새(璽)’와 ‘보(寶)’ 자로 바뀌었다. 서체도 복잡한 첩전(疊篆) 위주에서 대부분 간명한 소전(小篆)으로 바뀌었다. 대한국새는 천은(天銀)으로 제작하여 도금하였고, 용손잡이[龍鈕]를 얹었다. 인판(印版)의 넓이는 9.4㎝이며, 인문은 구첩전(九疊篆)으로 ‘대한국새’ 넉 자를 넣었다.

[참고문헌]
■ 『대례의궤(大禮儀軌)』
■ 『보인부신총수(寶印符信總數)』
■ 『이조새보인압부신제(李朝璽寶印押符信制)』

■ [집필자] 성인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