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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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용위(壯勇衛)

서지사항
항목명장용위(壯勇衛)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장용청(壯勇廳), 장용영(壯勇營)
관련어무예출신(武藝出身), 액외장용위(額外壯勇衛), 금군(禁軍)
분야정치
유형집단 기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정조대에 왕의 호위를 전담한 친위 부대.

[개설]
장용위는 1785년(정조 9) 왕의 호위를 전담하기 위해 50명을 정원으로 창설되었다. 장용위는 1788년 장용영으로 확대 개편되는 토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장용영 설치의 시초이며, 1793년 장용영 내영제와 외영제가 성립되었을 때 장용위는 내영에 소속되었다. 하지만 1800년 정조가 승하하자, 1802년(순조 2) 장용영이 혁파되는 가운데 장용위도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777년 정조는 자신의 호위를 강화하기 위해 숙위소(宿衛所)를 설치하고 홍국영을 대장으로 임명하였으나, 홍국영의 권세가 너무 커지자 1779년 홍국영을 조정에서 물러나게 하고 숙위소도 혁파하였다. 하지만 홍국영 잔여 세력의 역모 시도가 이어지는 가운데, 홍국영의 사촌 아우인 홍복영의 역모 사건까지 발생하였다. 이에 정조는 1782년 무예출신(武藝出身) 및 무예별감(武藝別監)으로 장교를 지낸 30명으로 대(隊)를 편성시켜 창경궁 명정전에 입직(入直)시켰고, 1785년 20명을 추가하여 왕의 호위 부대로서 장용위를 창설하였다[『정조실록』 17년 1월 12일].

장용위라는 명칭은, ‘과거에 설치되었던 친군위(親軍衛)와 장용위, 1595년(선조 28) 숙위를 위해 용건(勇健)한 자를 더 선발한 후 붙여진 명칭인 무용위(武勇衛), 1637(인조 15) 국별장청(局別將廳)에 하사된 이름인 무용청’에 들어 있는 친군·장용·무용 중에서, 정조가 장용을 선택함으로써 결정되었다[『정조실록』 9년 7월 2일]. 아울러 장용위 설치는 정조가 자신의 의도대로 정국을 운영하기 위한 군영 개혁의 출발점이며, 장용영 설치의 시초가 되었다.

그런데 공천(公賤)·사천(私賤)으로 구성된 장용대가 1475년(성종 6) 명칭을 장용위로 고친 후[『성종실록』 6년 12월 16일] 병자호란 직전인 1636년(인조 14) 7월에도 존재하였음을 『승정원일기』를 통해 알 수 있고, 장용영이 설치된 후에도 장용위를 장용영과 동일시한 기록도 있다[『정조실록』 22년 10월 19일]. 따라서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장용위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정조대 장용위, 조선전기에 설치되어 병자호란 직전에도 존재했던 장용위, 장용영’의 기사 내용을 잘 구분하여 정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직 및 역할]
1785년 창설된 장용위는 무예출신 및 무예별감으로 장교를 지낸 사람 50명으로 구성되어 정조의 호위를 담당하였다. 『장용영절목초(壯勇營節目抄)』에 의하면 장용위는 좌열(左列)과 우열(右列)로 나뉘었고, 각 열의 정원은 25명이었다. 좌열이나 우열의 25명 중 16명은 입번(入番)하였고, 9명은 휴번(休番)이었다. 각 열에는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일을 잘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을 패두(牌頭)로 임명하였다. 아울러 좌열과 우열에서는 각각 100보(步)에서 철전(鐵箭) 3번을 쏘는 등의 취재(取才)를 통해 한산(閑散) 3명을 설치하여 결원이 생기면 보충하도록 하였고, 한량(閑良)이나 출신(出身)을 막론하고 병서취재(兵書取才)를 통해서도 각 열마다 2명을 선발하도록 하였다.

[변천]
장용위는 1785년 50명을 정원으로 창설되어, 1788년 장용영으로 확대 개편되는 토대가 되었다. 장용위는 1791년 금군에서 50명을 제공받아 정원이 100명으로 확대되었고, 장수 집안의 자손이나 지벌(地閥)이 두드러지는 사람 등에서 15명을 액외(額外)장용위로 임명하였다. 1793년 장용영 내영과 외영 제도가 성립하였을 때, 장용위는 장용영 병방(兵房)이 장용내사(壯勇內使)를 겸임하는 내영에 소속되었다. 하지만 정조가 1800년 승하하자, 1802년 정조의 친위 부대였던 장용영이 혁파되었다. 그 결과 장용위도 함께 폐지되어 장용위 100명이 금군에 환원되었고[『순조실록』 8년 4월 20일], 22명으로 증가하였던 액외장용위도 금군의 별후사(別後司)에 소속시키는 조치가 시행되었다[『순조실록』 2년 2월 7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홍재전서(弘齋全書)』
■ 『장용영대절목(壯勇營大節目)』
■ 『장용영절목초(壯勇營節目抄)』
■ 이홍두, 『조선시대 신분 변동 연구: 천인의 신분 상승을 중심으로』, 혜안, 2000.
■ 김준혁, 「정조대 장용위 설치의 정치적 추이」, 『사학연구』78, 2005.
■ 노영구, 「정조대 오위 체제 복구 시도와 화성 방어 체제의 개편」, 『진단학보』93, 2002.
■ 이방섭, 「정조의 장용영 운영과 정치적 구상」, 『조선시대사학보』53, 2010.
■ 이왕무, 「화성축조와 장용영 창설」, 『한국군사사』7-조선후기Ⅰ, 육군본부, 2012.
■ 이태진, 「정조대의 왕권강화와 장용영 경영」, 『한국군제사』근세조선후기편, 육군본부, 1977.

■ [집필자] 서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