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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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우정(喜雨亭)

서지사항
항목명희우정(喜雨亭)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창덕궁(昌德宮)
동의어취향정(醉香亭)
관련어기우제(祈雨祭), 별서(別墅), 서향각(書香閣), 영화당(暎花堂), 초당(草堂)
분야문화
유형건축·능 원 묘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①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별서(別墅)에 있던 정자.

② 창덕궁 북쪽에 있는 초당(草堂).

[개설]
① 왕이 농사 형편을 살피거나 군사훈련을 위해 거둥하였을 때 머물거나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② 1645년(인조 23)에 건립되었으며 옛날 이름은 취향정(醉香亭)이다. 1690년(숙종 16)에 희우정(喜雨亭)으로 이름을 고쳐 휴식을 취하는 정자로 사용했다.

[위치 및 용도]
① 한양의 서교(西郊)에 있었다.

② 창덕궁 영화당(暎花堂)서향각(書香閣) 북쪽에 있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서교 희우정의 경우, 세종이 모화루(慕華樓)에 거둥하여 격구(擊毬)하는 것을 구경하고, 서강(西江)에 있는 효령대군 이보(李補)의 별서에 이르렀다. 강 언덕 정자에 앉아 포(砲) 놓는 것과 군사들이 말 타고 활 쏘는 것을 관람하고 술잔치를 열었다. 대군에게는 안장 갖춘 말과 본궁 근처의 농토 40여 섬지기 땅을 하사했다. 이날 세종은 홍제원(洪濟院)·양철원(良哲院)에서 영서역(迎曙驛) 갈두[加乙頭] 들에 이르기까지 고삐를 잡고 천천히 가고 있었다. 길에는 밀·보리가 무성하여 세종은 기뻐하며 정자 위에 올라 잔치를 벌이려 하였다. 이때 마침 큰 비가 내려서 잠깐 사이에 사방의 들에 물이 흡족하니, 세종은 매우 기뻐하며 그 정자의 이름을 희우정이라고 지었다[『세종실록』 7년 5월 13일].

창덕궁 희우정의 경우, 1690년(숙종 16)에 오래도록 가물어 숙종이 대신까지 보내어 비를 빌었는데 4월 28일 비로소 비가 내렸다. 왕이 기뻐하며 금원(禁苑)의 취향정을 고쳐서 희우정이라 이름 붙이고, 친히 정자의 명(銘)을 지어서 적었다[『숙종실록』 16년 4월 28일]. 영조대인 1771년(영조 47) 7월 23일에 영조는 지난 밤 내린 비로 인하여 심기가 청명해졌다. 당시 경희궁의 자정전(資政殿) 서랑(西廊)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으므로 희우정의 예에 의거하여 그곳을 우문각(右文閣)이라 이름하였다.[『영조실록』 47년 7월 23일]

[참고문헌]
■ 『궁궐지(宮闕志)』

■ [집필자] 정정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