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후릉은 시신을 모시는 현궁이 석실로 된 쌍릉이다. 석실로 만들고 그 위에 각각의 봉분을 얹은 쌍릉이다. 오늘날의 북한 황해북도 개풍군 흥교면 흥교리 백마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능직(陵直)과 권무(權務) 2명, 수호군(守護軍) 40호를 두었으며, 호마다 밭 2결을 주어 관리하게 하였다.
[조성 경위]
1412년(태종 12)에 정안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송경(松京) 해풍군(海豐郡) 백마산 기슭에 안장하고 능호를 후릉이라 하였다. 산릉의 공역은 조선초기에 왕실 공역을 주로 담당했던 박자청(朴子靑)이 맡아보았다.
정종은 산릉 조성 후 정안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능의 서쪽에 있던 흥교사(興敎寺)를 혁파하지 않고 재궁으로 삼았으며 선종(禪宗)에 붙여 밭 250결을 주었다. 1419년(세종 1)에는 정종이 승하하였는데, 합장해 달라는 유언에 따라 영역(瑩域)의 흙을 바꾸고 함께 묻어 쌍분을 조성했다.
[조성 상황]
후릉은 조선초기의 풍습에 따라 석실로 조성되었다. 정종이 승하한 뒤 합장하여 쌍분을 만들고 주변에 돌난간을 둘렀으며, 봉분 뒤쪽에는 곡장(曲墻)을 세웠다. 봉분 맨 앞쪽 상단 계체석(階砌石)에는 혼유석 2기와 양석 및 호석을 번갈아 배치하였다. 중계(中階)에는 석등 2기, 문인석 2쌍과 마석 2쌍을, 하계(下階)에는 무인석 2쌍과 마석 2쌍을 두었고, 중계와 하계의 동서에 각각 작은 돌층계를 설치하였다.
[변천]
조선시대의 왕릉은 봉토분이므로, 일정 기간이 지나면 봉분이 내려앉는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왕실에서는 정기적으로 능상(陵上)을 보수했는데, 이는 후릉도 다르지 않았다. 능상을 보수한 일 외에 후릉의 개수(改修)는 크게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먼저 1544년(중종 39)에 화재로 불타 버린 정자각을 다시 지었다. 1666년(현종 7)에는 봉분과 석물의 개수를 논의했으나[『현종실록』 7년 10월 26일], 봉분 내에 문제가 있으면 공역이 커질 것을 염려하여 상석(象石) 및 석물만 보수하였다. 마지막으로 1755년(영조 31)에는 비석이 세워지지 않은 이전의 왕릉과 더불어 비석과 비각이 세워졌다.
후릉은 북한에 있어서 오늘날의 모습을 상세히 알 수 없다. 다만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펴낸 『가보고 싶은 왕릉과 그 기록-풀어쓴 후릉수개도감의궤』에 따르면, 봉분과 상설(象設)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으나 정자각은 초석만 남아 있는 상태라고 한다.
[관련 사항]
후릉은 왕릉 중에서 석물이 가장 간략하다는 이유에서, 1698년(숙종 24) 노산군(魯山君)을 단종으로 복위시키고 그 묘를 장릉(莊陵)이라 하여 다시 조성할 때 그 의절(儀節)의 예가 되었다.
[참고문헌]
■ 국립문화재연구소, 『가보고 싶은 왕릉과 그 기록-풀어쓴 후릉수개도감의궤』, 국립문화재연구소,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