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내용]
조선시대에 사용하던 『대명률』의 형벌 체제는 태(笞)·장(杖)·도(徒)·유(流)·사(死)의 5형(刑) 체제를 기본으로 하였다. 5형 중에 가장 무거운 형벌인 사형(死刑)은 다시 교형(絞刑)과 참형(斬刑)으로 구분되었으며, 반역(反逆)·강상(綱常) 죄인은 능지처사(陵遲處死)에 처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대명률』에서 규정하고 있는 이러한 정형(正刑) 이외에 책형(磔刑)·거열(車裂)·효수(梟首)·육시(戮屍)·약살(藥殺) 등과 같은 사형이 행해지기도 했다.
효수는 참수(斬首) 후에 머리를 대막대기 혹은 막대기 끝[竿頭]에 매달아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는 형벌로, 현간시중(縣竿示衆)이라고 하여 원래 중국에서 유래된 사형 방법이다. 효수는 여러 사람들을 경계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행해졌는데, 그 장소는 저자[市]일 때가 많았지만 일정하지는 않았다.
1394년(태조 2)에는 서소문(西小門)의 옹성(甕城)이 무너지려 하자, 이를 시공했던 석장(石匠)의 목을 베어 그곳에 매달게 하였으며, 단종 연간에는 수양대군에 의해 김종서(金宗瑞), 조극관(趙克寬), 황보인(皇甫仁) 등이 저자에 효수되었다. 1523년(중종 18)에는 중국의 예에 따라 강도(强盜)를 길가에 효수하여 오고 가는 이들에게 보이도록 하라는 전교(傳敎)가 내려지기도 하였으나, 조선에서 일찍이 강도를 효수한 바는 없고 형벌이 불합리하다는 검상(檢詳) 윤지형(尹止衡)의 견해가 받아들여져 결국 시행하지 않도록 하였다. 1744년(영조 20)에는 『속대전』의 율명(律名)을 정하는 과정에서 효시는 군법(軍法)이라 법전에 실어서는 안된다는 영조의 하교(下敎)에 대해, 당시 영의정(領議政) 김재로(金在魯) 등이 반대하여 결국 동래(東萊)와 의주(義州)에서 잠상(潛商)한 자 및 세미(稅米)에 물을 탄 자에 대해서 효시하는 규정을 수록하게 되었다. 1866년(고종 3)에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사교(邪敎)를 전하였다고 하여 군영(軍營)에서 효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