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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효릉은 인종의 유교에 따라 그의 부모인 중종과 장경왕후(章敬王后)의 능인 정릉(靖陵) 곁에 조성되었다. 그러나 1562년(명종 17)에 중종의 능침이 천봉되어, 오늘날 효릉 곁에는 장경왕후의 희릉(禧陵)만 남아 있다.
[조성 경위]
인종은 1545년(인종 1) 7월 1일에 승하하였는데, 그 전해에 승하한 부왕 중종의 삼년상을 마치지 못하고 병을 얻어 효를 다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였다. 그래서 자신을 부모의 곁에 묻어 줄 것과 상장(喪葬)에 관한 것은 모두 소박하게 하라는 유교를 남겼다. 이 같은 인종의 유교는 인성왕후를 통해 언문(諺文)으로 승정원(承政院)에 전달되었다. 또 인종의 유교에 덧붙여 인성왕후 자신 또한 인종의 곁에 묻히고 싶다는 바람을 피력하였다.
인종의 뜻에 따라 산릉 터를 고를 때 가장 먼저 고양에 자리한 정릉 부근을 살펴보았다. 정릉의 백호(白虎) 언덕 너머에 있는 간목산(艮木山)이 형세가 좋으므로 그곳을 능지로 정하고[『명종실록』 즉위년 7월 11일], 능침을 조성하여 10월 15일에 장사를 지냈다.
1577년(선조 10) 11월 19일에는 인성왕후가 승하하였는데, 역시 왕후의 뜻에 따라 효릉에 동원(同原)으로 능침을 조성하고 이듬해 2월 15일에 안장하였다. 그해 10월에 수리 공사가 있었는데, 인종의 능을 조성할 때 산릉 공역에 신중치 못한 부분이 많아 노수신(盧守愼)을 총호사(總護使)로 임명해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선조수정실록』 11년 10월 1일]. 이때 인종의 봉분 주변에만 병풍석을 설치했다고 한다.
[조성 상황]
인종의 능에는 병풍석을 두었으며, 두 능을 함께 묶어 난간석을 둘렀다. 두 능침 주변으로 동·서·북 삼면을 두르는 곡장(曲墻)을 설치하였고 혼유석은 각각 1개씩 봉분 앞에 두었으며, 중앙에 장명등 1좌와 좌우 망주석 1쌍을 배치하였다. 문인석과 무인석은 모두 합설하여 1쌍씩 배치하였고, 마석과 호석을 2쌍씩 두었다.
능침 아래 49보 즈음에는 정전 3칸에 배위청 3칸 규모의 정자각이 자리 잡고 있다. 효릉의 정자각은 원래 좌우에 익각(翼閣)을 갖춘 5칸 규모의 정전과 배위청 3칸으로 이루어진 총 8칸의 건물이었으나, 좌우 익각이 소실되어 오늘날에는 총 6칸만 남아 있다. 또 정자각 아래 서쪽에는 수라간 2칸, 동쪽에는 수복방 2칸이 있었으나, 소실되어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정자각 남쪽에는 홍살문이, 동쪽에는 1753년(영조 29)에 세운 표석과 표석을 보호하기 위한 비각이 있다. 영조 연간에 비(碑)와 비각을 갖추지 않은 능소에 비를 세우는 공역이 대거 진행되었다. 1753년 1월에 11일에 도감을 설치하고 효릉 외에 장릉(章陵)·강릉(康陵)·태릉(泰陵)·희릉의 공역과 함께 이루어졌다[『영조실록』 29년 1월 11일]. 『효릉지(孝陵誌)』에는 당시의 건물 배치가 간가도(間架圖)의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재실에 대한 기록은 『춘관통고(春官通考)』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홍살문 서쪽으로 약 90보 거리에 10칸 규모의 전사청을 두었고, 그 옆에는 2칸의 제기고를 조성하였다. 또 전사청 서쪽에는 재실 4칸과 안향청 7칸을 두었으며, 그 남쪽에 연지(蓮池)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