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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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

서지사항
항목명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
용어구분전문주석
하위어부사(副使), 정사(正使), 종사관(從使官)
관련어문위행(問慰行), 통신사(通信使), 탐적사(探賊使), 회답사(回答使)
분야정치
유형직역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일본의 요청으로 1607년(선조 40)·1617년(광해군 9)·1624년(인조 2)에 막부장군에게 파견된 조선의 국왕사절. 일본 막부장군이 먼저 국서를 보낸 데 대하여 조선이 ‘회답’하고, 임진·정유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을 데려오는 ‘쇄환’한다는 두 가지 목적을 띠고 파견된 사행.

[개설]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 일본이 먼저 강화교섭을 요청한 데 대하여 조선이 ‘회답’한다는 것과 임진·정유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을 데려오는 ‘쇄환’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띠고 파견된 사행이라는 뜻이다. 1607년·1617년·1624년 세 차례에 걸쳐 파견되었다. 사행의 파견 절차나 편성 체계에 있어서 통신사와 별다른 차이가 없고, ‘국왕사절’이라는 점에서 조선후기 통신사행으로 통칭되고 있으며 통신사로 포함되어 논의되어 왔으나 사행 명칭이 ‘통신사’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구별되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임진왜란 이후 조일 국교재개 과정]
임진왜란 이후 단절되었던 조선과 일본의 통교재개에 대한 교섭이 본격화된 것은 전쟁이 끝난 직후인 1599년(선조 32) 3월 대마도주의 사자 파견부터이다. 이후 수차례에 걸쳐 화호를 청하는 사자를 파견해 왔는데, 그들은 올 때마다 임진왜란 당시 포로 잡혀간 조선인을 동반하여 왔다. 한편 수차례에 걸친 일본의 화호 요청에 조선은 그 사실을 명(明)에 알리는 한편 동래인 박희근(朴希根)으로 하여금 예조의 공문을 가지고 대마도에 다녀오도록 하였다. 이것이 조선의 의사를 밝힌 최초의 일이었다. 그러나 조선에서도 이미 일본과의 통교 단절은 실리성이 없음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며, 단지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일본에 대한 증오심과 일본에 대한 정보에 어두운 것이었다. 따라서 조선은 일본의 정세와 그들의 진의를 파악하는 데 주력하여, 귀환한 포로를 통하여 일본의 사정을 청취하거나 사람을 몰래 파견하여 정탐하게 하였다.

1600년 8월에 조선에 와 있던 명나라군도 완전히 철수하고 같은 해 일본에서는 세키가하라전쟁[関が原の戦]으로 덕천가강(德川家康, [도쿠가와 이에야스])이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자, 이후 강화교섭은 조일 양측 모두 적극적인 자세로 교섭을 진척시켜 갔다. 교섭 방법은 일본 측이 대마도를 통하거나 혹은 대마도가 독단적으로 사신을 파견하였을 때는 부산포 왜관에서 조선 측이 접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조선 측에서도 정식으로 대마도에 사신을 파견하여 상대국의 정세를 탐색하고 교섭을 진행시켰다.

1603년 2월 덕천가강이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에 오르자 일본 측의 강화교섭 요구는 부산에서 종래와 같이 통상무역을 할 수 있도록 개시(開市)를 허가하는 것뿐만 아니라 정식 통신사 파견 요청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별 진전이 없다가 1604년(선조 37) 6월 조선에서 일본의 국내 사정을 정탐하기 위하여 승려 유정(惟政)과 손문욱(孫文彧)을 탐적사(探賊使)로 대마도에 파견하면서 상황은 급진전하였다. 그것은 이들 탐적사가 휴대한 서계에 대마도민의 왜관교역을 허락한 내용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었고, 또한 이들 탐적사는 대마도주의 안내로 경도(京都, [교토])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을 만나 국교재개에 관한 막부의 진의와 정세를 정탐하였으며 귀국할 때 3,000명의 피로인을 데리고 귀국함으로서 양국 관계는 훨씬 진전되었다.

강화교섭의 전제로 조선에서는 대마도를 통하여 강화를 위해서 2가지 조건을 제시하였다. 하나는 덕천가강 명의의 국서를 보내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전쟁 중에 왕릉을 파헤친 도굴범을 잡아 보내라는 것이었다. 조선이 덕천가강의 국서를 보내라는 것은 일본이 임진왜란의 침략 행위를 사죄하지 않으면 강화 요청에 응할 수 없다는 강한 의지를 나타낸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왜란 이후 일본 국내사정에 대한 정확한 정보 확인과 일본의 최고 통치권자와 조선 왕이 교류한다는 기본 원칙에 충실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도굴범의 송환은 능을 도굴한 행위가 개인적인 범죄가 아니라 조선이라는 국가를 범한 것으로 보고 이에 대한 응징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었다. 즉, 왕릉의 도굴로 일그러진 국가의 체면을 다시 세우겠다는 것이었다.

조선 측에서 제시한 2가지 조건은 1606년(선조 39) 8월 대마도에 전달되었는데 불과 1개월 만에 국서의 초안이 도착하고 곧이어 대마도인 2명이 압송되어 왔다. 예상보다 빠르게 이루어진 것에 대한 논란이 거듭되었지만, 조선으로서는 명분과 실리에서 유리한 결과를 얻었기 때문에 일본과의 강화를 계획하고 사절의 파견과 왜관의 신축을 결정하였다.

[회답겸쇄환사의 파견]
조선은 1607년(선조 37) 1월 정사 여우길(呂祐吉), 부사 경섬(慶暹), 서장관 정호관(丁好寬) 등 467명의 사절단을 일본 막부에 파견하였다. 이들은 5월에 강호(江戶, 에도)에 도착하여 6월에 장군 덕천수충(德川秀忠, [도쿠가와 히데타다])을 만나 조선 왕의 국서를 교환하고 이어 준부(駿府, [순뿌])에서 덕천가강을 만난 후 7월에 피로인 1,240명과 함께 한양에 돌아와 선조에게 복명하였다.

이리하여 임진왜란으로 단절되었던 양국의 통교 관계가 회복되고 두 나라 사이에 정식 외교 관계가 수립된 것이다. 그러나 조선에서 파견한 사절단의 명칭은 일본이 요구한 ‘통신사’가 아니었다. 조정에서는 일본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통신’이라는 칭호는 사용할 수 없고, ‘통유(通諭)’로 하자는 제안도 있었지만 결국 일본에서 먼저 보내온 국서에 답하고 임진왜란 당시 잡혀가 피로인을 귀환시킨다는 의미의 ‘회답겸쇄환사’로 정하였다. 당초 일본에서 보내왔던 국서는 조선에서 의심하였던 것처럼 대마가 국교회복을 갈망한 나머지 위작하였던 것이었고, 조선에서는 국교 회복의 실리 때문에 위작의 국서를 묵인하였던 것이다.

이후에도 1636년(인조 14) 통신사 명칭이 사용되기까지 회답겸쇄환사의 파견이 두 차례 더 있었다. 1617년(광해군 9)에는 정사 오윤겸(吳允謙) 외 428명의 사절단이 일본에 갔으며 국서교환의식은 그해 8월 경도(京都) 복견성(伏見城, [후시미성])에서 있었다. 1624년(인조 2)에는 덕천가광(德川家光,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장군습직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로 정사 정립(鄭岦) 외 460명의 사절단이 파견되었다. 세 차례에 걸친 회답겸쇄환사의 파견 목적은 물론 강화를 위한 것이었기는 하나 더 중요한 목적은 일본군 재침의 우려와 점차 고조된 북방의 견제를 위한 대일우호의 유지 및 일본의 국정 탐색, 피로인 쇄환이었다. 조선이 1607년(선조 40)·1617년(광해군 9)·1624년(인조 2)에 파견된 사절단의 통신사라 하지 않고, ‘회답겸쇄환사’라는 칭호를 썼다는 것은 조선에서는 이 시기만 하더라도 도쿠가와(德川) 막부를 신의를 통할 수 있는 통신국(通信國)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통신사의 성립]
1630년대를 전후해서 조일 양국의 외교사행 체제에 변화가 나타났다. 기유약조에 의한 규정된 일본의 대조선 외교사절은 차왜의 정례화로 변하였고, 조선의 대일본 사행은 일본 막부에 보내는 ‘통신사’와 대마도주에게 보내는 ‘문위행’의 이중 체제로 조정되었다. 이런 변화는 조일 양국의 상호 외교정책의 변화에 기인한 것이었다.

조선이 대일교린 체제를 개편하게 된 배경은 첫째, 세 차례에 걸친 회답겸쇄환사가 왕래하는 동안 대마도에서는 계속 조일 양국의 국서를 개작하였다. 그러나 1631년(인조 9) 대마도의 가신 유천조흥(柳川調興, [야나가와 시게오키])과 대마도주 종의성(宗義成, [소우요시나리])의 알력으로 양국의 국서가 개작되었다는 사실이 폭로되었다. 이 사건을 일본에서는 유천일건(柳川一件, [야나가와사건])이라고 한다. 이 사건 직후 1635년(인조 13) 막부는 요시나리의 요청으로 이정암윤번제(以酊庵輪番制)를 제정하고, 국서의 체제를 확립하여 조선에 대한 방침을 정하였다. 이정암윤번제란 경도 오산(五山)의 승려를 1년 내지 3년의 윤번으로 대마부중(對馬府中)의 이정암에 거주시켜 조선과의 왕복 문서에 관한 일을 관장시킨 제도이다. 후에는 통신사의 접대에 관한 일도 이정암의 승려가 담당하였다.

[구성]
사절단의 구성은 통신사와 같이 삼사라고 하는 정사·부사·종사관(서장관)이었으며 그 외는 모두 수행원의 성격을 가졌다. 이들 인원은 대체로 400~500명에 달하는 대인원이었다. 정사는 문관의 당상관(정3품 이상)으로 예조 참의를 임명받고, 부사는 문관의 당하 3품에 홍문관 전한(典翰)을 받으며, 종사관은 문관5·6품에 홍문관 교리의 관직을 주어 임명하였다. 이렇게 구성된 사절단은 외교문서인 서계와 별폭을 지참하였다. 서계는 막부장군에게는 조선 왕의 명의로 국서가 작성되었고, 그 외에 대마도주나 막부의 관리들에게는 예조 참판 또는 참의·좌랑 등 상대방의 지위에 따라 그에 상응한 직명으로 서계가 작성되었다.

[의의]
조선시대 한일 관계에 있어 1607년의 회답겸쇄환사는 임진왜란 이후 단절된 조일 외교 관계를 부활시킨 것이다.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변례집요(邊例集要)』
■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
■ 『통신사등록(通信使謄錄)』
■ 손승철, 『朝鮮時代 韓日關係史硏究』, 지성의 샘, 1994.
■ 三宅英利, 『近世日朝關係史の硏究』, 文獻出版, 1987.
■ 양흥숙, 「17세기 전반 회답겸쇄환사의 파견과 경제적 의미」, 『항도부산』 21, 2005.
■ 홍성덕, 「17세기 조·일외교사행 연구」, 전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8.

■ [집필자] 장순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