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정의]
고려후기 위화도회군을 주도한 이성계 등 48명을 대상으로 공양왕대에 책봉된 공신.
[내용]
1388년(우왕 14) 5월에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와 조민수 세력은 회군 이후 정치적 주도권을 놓고 대립하였다. 공양왕이 이성계 세력에 의하여 옹립됨으로써 이성계가 최후 승자가 되었다.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한 이성계 세력은 위화도회군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공신 책봉을 추진하였다. 1390년(공양왕 2) 4월에 이성계·조민수 등 54명의 회군공신이 선정되었으나, 최종적으로는 이성계에게 대항하였던 조민수·변안열·지용기·왕안덕·최공철·김백흥 등 6명을 제외한 48명만이 1391년(공양왕 3) 2월에 회군공신으로 책봉되었다. 1등 회군공신은 이성계 1명으로서 전(田) 100결을 받았다. 2등 회군공신은 심덕부 등 17명으로서 전 50결을 받았다. 3등 회군공신은 최선 등 30명으로서 전 30결을 받았다. 48명의 회군공신에게는 1391년 8월에 공신녹권이 하사되었다.
회군공신 48명은 대부분이 조선왕조 개국에 참여하여 개국공신 또는 개국원종공신이 되었다. 조선왕조 개국 직후인 1393년(태조 2) 7월에 명나라와 외교 분쟁이 일어나자 정책적인 배려에서 55명의 회군공신이 다시 책봉되었다. 회군공신 책봉은 위화도회군의 정당성을 천명함으로써 회군 이후 이성계의 정치적 행보 및 조선건국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