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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조선 왕조는 호적을 정비하여 장정(壯丁)의 총수와 거처를 확실하게 파악함으로써 국가 재정의 근간을 이루는 부역을 균일하게 부과하고자 했다. 이와 같은 국가 운영의 기축이 되는 호구 성적(成籍)과 관련하여 실시된 제도가 호패법(號牌法)이다. 즉 호패를 지닌 자는 호구 성적에서 빠진 자가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며, 호패가 없는 자는 호구 성적에 빠진 자이므로 엄격히 법에 의거하여 처단되었다. 호패는 2품 이상과 삼사(三司)의 관원인 경우에만 관청에서 제작한 것을 지급받았고, 대부분의 경우는 각자가 호패에 기재할 사항인 성명·출생 신분·직역·거주지 등을 보고 문서인 단자(單子)로 만들어 관청에 제출한 다음 관청 단자와 대조하여 낙인받은 뒤에 지급받았다. 신분에 따라 호패의 재질과 기재 내용이 다른데, 『속대전』 「호전」 호적조의 규정에 따르면 2품 이상은 아패(牙牌), 3품 이하 잡과 입격자는 각패(角牌), 생원·진사는 황양목패(黃楊木牌), 잡직·서인·서리는 소목방패(小木方牌), 공천·사천의 경우는 대목방패(大木方牌)를 사용했다. 이후 이 규정은 개정되지 않았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군역 등을 부과하기 위해 백성을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고려시대에도 호적을 작성하였다. 고려말에는 호적 제도가 문란해져 양천(良賤)의 혼효와 소송의 폭주, 양인에 대한 과중한 수탈, 양인의 세력가에 투탁과 농장(農場)의 발달 등의 폐단이 발생하였다. 조선 건국 후 토지 제도와 호적 제도를 정비하였는데, 1393년(태조 2)에 남정 16세에서 60세 이하를 국역 부담자로 정하였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호적 제도의 실효를 거둘 수 없었기 때문에 호패법(號牌法)을 실시하였다. 1398년(태조 7)에 호구를 작성하면서 호패를 발급하고 이를 지니지 않은 자를 처벌하려고 하였으나, 건국 초의 상황으로 전면적 실시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1413년(태종 13)에 본격적인 실시를 하였다. 이후 1459년(세조 5), 1610년(광해군 2), 1626년(인조 4), 1675년(숙종 1) 네 차례 실시를 하였다.
호패법 실시의 직접적인 동기는 대외 관계의 변화에 말미암았는데, 군역 등 국역을 부담하는 양인을 확정하고 또 유민(流民)을 금지하기 위해 백성을 파악하기 위한 조치이었다.
[내용]
호패는 인구 파악을 위한 기초 자료이므로, 호적의 정비와 함께 완비되었다. 호패에 대한 법규는 『속대전』에 많이 수록되었다. 「호전」 호적조에서는 16세 이상의 남정(男丁)은 호패를 패용(佩用)해야 하며, 관품과 신분에 따라 재질과 규격을 달리 하였다. 주관 부서는 서울은 한성부, 지방은 각 관서였다. 호패를 패용하지 않는 자는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로 논죄하여 장 100으로 처벌하였으며, 타인의 호패를 빌려 패용한 자는 호적에서 누락된 율[漏籍律]로 보아 본인은 사족이면 유배를, 평민이면 군인으로, 사천(私賤)이면 섬에 유배를 보내었으며, 빌려준 자는 장 100·도 3년으로 처벌하였다. 호패에 직역(職役)이나 성명 등을 제대로 기재하지 않은 자 역시 장 100·도 3년으로 처벌하였다. 「형전」 위조조에서는 호패를 위조한 자는 인신(印信)을 위조한 죄로 논하여 본인은 사형에 처하고, 처자는 노비로 삼았다. 「예전」 제과조에는 과거에 응시할 때에도 신분을 확인하기 위하여 제출해야 하며, 「병전」 조전(漕轉)조에는 조운선의 선주나 사공, 군졸 등도 호패로 신분을 확인하였다.
[변천]
1402년(태조 2)에 중국에서 정변이 발생하자 이에 대비해서 호구와 군적을 작성하는 것을 급선무로 하였다. 그 방법으로 호패를 지급하는 것과 경작 면적에 따르는 두 가지 중에 전자로 결정되었다. 1404년과 1406년의 조사 결과는 백성의 유이(流移) 등으로 실제의 인구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고, 호패법을 실시하여 이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논의를 거쳐 1413년(태종 13) 9월에 호패법을 전면적으로 실시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호패의 규격을 정하고 관원과 서인에 따라 재질을 다르게 하였다. 실시 방법은 서울에서는 한성부, 지방에서는 계수관(界首官)이 담당하고, 본인이 호패를 제출하게 하여 날인하였다. 호패의 내용은 2품과 3품 이상은 관직만 기재하고, 산관(散官) 3품 이하는 성명과 거주지를, 서인은 여기에다가 인상착의까지 기재하도록 하였다. 그 해 10월 11일부터 지급하여 연말에 완료하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호패를 발급받지 않은 자, 빌려주거나 받은 자, 분실한 자에 대한 처벌 규정도 정비하였다.
호패의 발급으로 인구 파악이 제대로 되자 양인의 국역 부담이 증대되어 도피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여 재론되었고, 1416년(태종 16)에 폐기하였다.
세종대도 호패법에 대한 찬반이 있어 결국 실현하지 못하였다. 세종 말부터 북쪽의 정세에 이상이 있자 호패법이 재론되었으며, 1458년(세조 4) 4월에 재정립되었다. 호패법은 존비(尊卑)를 밝히고 인구를 파악하는 취지로, 천인까지 포함하여 전국민을 대상으로 하였다. 호패의 견본을 보내어 지방에서 만들게 하고 성명은 물론 인상착의까지 기재하게 하였다. 그 해 말까지 완료하도록 하였으며, 이후 발급받지 않은 자, 분실한 자, 빌린 자를 처벌하였다. 그리고 이정과 감고(監考) 등은 호패를 분급하면서 호적에 기재하도록 하여 인구 파악을 제대로 하였으며, 사망과 이사 등에 대한 조처도 마련하였다. 신분에 따라 재질과 기재 내용을 다르게 하였다. 1463년(세조 9) 1월에 사목(事目)을 제정하였다. 이 사목은 당시까지의 호패를 시행하면서 나타난 문제점을 해결한 종합이다. 지방에서의 시행과 발급 방법과 후의 증빙, 신분·관직의 변화, 규격과 재질 등을 종합하였다. 이 때 양인의 확대하기 위한 조처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호패와 호적의 완비는 백성들에게 부담이 되고 또 양인을 모점(冒占)하고 있는 세력가에게도 불리하기 때문에 호패법을 엄격히 시행할수록 양인의 수는 줄어들어 결국 1469년(성종 즉위)에 폐지하였다.
임진왜란 중인 1593년(선조 26) 선조는 호패를 발급할 것을 검토하라고 비변사에 명하였고, 1598년 비변사에서는 식구 수를 계산하여 쌀을 내게 하고 바치는 자에게 호패를 발급하도록 하며, 호패의 뒷면에는 거주, 직업, 용모, 나이를 앞면에는 발급한 읍명(邑名)을 낙인하고, 통행할 때 기찰할 것을 제안하였다. 비변사에서 계속해서 시행을 청하였으나 실행되지는 못하였다. 1609년(광해군 1) 4월에 군적을 정리하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비변사가 중심이 되어 호패법의 시행을 주장하여, 이듬해에 사목을 마련하고 1611년 정월부터 시행하기로 하였다. 이는 군적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 후금(後金)의 위협이 있는 분위기 때문에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 그렇지만 국역의 부담을 회피하기 위해 양인이 학적 또는 천적에 편입하거나 아예 거주지에서 떠나버리는 등으로 실효를 거둘 수 없었다. 그래서 계속 호패 시행 기일을 연기하다가 결국 이듬해인 1612년 4월에 공식적으로 폐지를 선언하였다.
1623년(인조 1)에 일차 논의가 있었으나 군적을 정리하고 백성을 안정시키기 위해, 1625년 6월 호패법을 실시하기로 결정하고, 7월에 호패청 당상을 임명하고, 호패사목을 마련하였다. 1차 연기한 다음은 서울은 1626년 3월, 지방은 4월부터 시행하고 이에 따라 처벌하였다. 그러나 1627년 1월 후금의 군대가 침략하자 비변사에서 호패법의 중지를 건의하여, 강화도로 운송할 호패성책(號牌成冊)을 불살라 호패 제도는 폐지되었다. 이의 재시행하자는 논의가 있었는데, 호패법과 군적법을 실시하여 민심이 이반한 것을 이용한 유효립(柳孝立) 등의 역모 사건을 계기로 더 이상 호패제는 거론되지 않았다.
인조대의 호패법은 사목이 남아 있기 때문에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있다. 사목에서는 대상과 작통법, 승려·군인 등 특수 직역자에 대한 처우와 시행 기일, 위반자에 대한 처벌 등을 수록하였는데, 그 규정은 다음과 같다. 단자식(單子式)에서는 개인이 호패를 제출할 때 기재할 내용과 방식을, 성책식(成冊式)은 오가작통법에 따른 호패 문서의 정리법을, 패식에서는 호패를 만드는 방법 등을 규정하였다. 호패 발급 대상을 모든 15세 이상의 남자로 규정하였고, 국역 부담 대상자인 양인의 경우는 확대하였다. 군민, 승려, 가(家)와 현거주가 일치하지 않는 자와 은닉자, 범죄자에 대한 처리 방법, 양인을 확보하기 위한 규정과 노비에 대한 규정, 학생 등에 대한 규정을 두었다. 호패 발급 후의 변동과 추가 등에 따른 작통법과 호패와 관련된 문서의 작성과 보관 방법, 호패법의 시행 기일과 일정, 변동 사항의 처리 방법, 위반자의 처벌 등에 대해 규정하였다. 그리고 호패의 종류와 패용 대상 등과 호패를 작성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을 언급하였다.
북벌 정책을 추진함에 우선해야 할 것은 군병의 확보였다. 이전 호패법이 실패한 이유는 양인이 호패를 받지 않고 도망을 하였기 때문이다. 1675년(숙종 1)에 앞의 실패를 거울삼아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먼저 실시하고 이에 대한 사목을 제정하였고, 이어서 호패법을 실시하였다. 이때에는 호패가 아닌 지패(紙牌)를 사용하였다. 그 이유는 지패가 경제적으로 효율적이며, 간지하기 쉽고 또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수 있으며, 위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 역시 발표함과 동시에 중국의 정변과 관련하여 지패를 받는 즉시 군병으로 징집된다는 등의 소동이 일어났지만, 숙종은 계속 시행하였다. 또 하나의 문제는 이전의 호패는 신분 간에 재질을 다르게 하는 등 차등을 두었는데, 지패는 그렇지 않은 점이 문제로 제기되기도 하였다. 1680년 명의 유장 오삼계(吳三桂)가 사망하여 중국의 정변이 안정되자 소동도 가라앉아 군병 징집의 필요성은 없어졌으나 오가작통과 지패법은 그대로 시행되었다.
이후 호패법은 재론되지 않았는데, 이는 군사적으로 안정되면서 징병제에서 모병제의 일종인 고립수포제(雇立收布制)로 점차 전환되어 호패법의 성격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즉 종전의 호패법은 궁극적으로 인구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군적을 만들어 군정(軍丁)을 선발하는 것이 주목적이 있었지만, 17세기 이후에는 군정의 선발과 관계없이 신분의 확인 또는 호적 제도의 보완 기능만 지니게 되었다. 나아가 오가작통제와 관련하여 호적을 보완하고 유민을 방지하며, 구휼(救恤) 집단과 인보(隣保)의 기능까지 하게 되었다. 특히 천주교가 전래된 이후에는 주민 상호 감시 체제로서 기능하기도 하였다.
[의의]
조선시대 국가의 토대는 인구와 토지이다. 인구를 파악하기 위해 호적을 조사하였고, 이의 기초는 호패법으로 개인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호패법은 국역을 부담하는 양인을 확보하고 또 직역을 분명히 하여 신분제를 유지하는 기능을 하였다. 이러한 의도는 신분에 따라 호패의 형식, 기재 내용 등 여러 곳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초기부터 이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특히 외국 침략의 우려가 있는 상황에서 제기되었다. 태종대에 본격적으로 실시하여 숙종대까지 5차례 치폐를 거듭하였다. 신분을 확정하고 이를 토대로 국역 부담자를 확정하기 위해 법적으로 강력하게 처벌하는 등 강력하게 시행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호패법은 실패하였는데, 그 이유는 과중한 국역 부담을 회피하려는 양인들이 도망하여 호패를 발급받지 않은 것이었다. 최종적으로 실시한 1675년(숙종 1)의 호패법은 오가작통법과 관련하여 폐지되지 않고 실시되었는데, 이는 군사 제도가 부병제에서 모병제, 즉 호패를 작성하여도 직접적으로 군역을 부담하지 않아도 되는 역사적 여건의 변화에 기인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