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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집[호(戶)]과 사람[구(口)], 또는 집과 사람의 수를 의미하거나 호구성적의 줄인 말, 즉 호적에 대한 이칭.
[개설]
호구(戶口)는 전통시대에 토지와 함께 국가를 구성하는 중요 토대였다. 따라서 국가 통치자는 자국 내의 호구 수와 농토 수 파악에 일차적 관심을 가졌고, 이를 위한 제도 마련에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호구는 국가가 공물(貢物)과 부역(賦役) 등의 세금을 부과하는 재원이었기 때문에 그 수의 파악이 더욱 중요하였다.
호구는 집[호(戶)]과 사람[구(口)]을 말하는데, 간혹 집과 사람의 수치를 의미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호구는 호구성적(戶口成籍)을 줄인 말 즉, 호적(戶籍)을 달리 부르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하였다[『태종실록』 2년 8월 2일].
그런데 조선시대 기록에 보이는 호의 성격은 조사 기준과 방식이 때때로 달라 그 성질이 상이한 경우가 많았다. 호는 각종 역역(力役)과 공물의 부과 징수를 위하여 일정한 편성 원칙에 따라 이루어진 편호(編戶)를 뜻하기도 하며, 기본적으로 자연태(自然態)의 주호(主戶)를 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호는 기본적으로 전지(田地)를 소유하고 있는 자연태 그대로의 가호를 의미하나 한성(漢城)과 같은 도시에서는 가옥을 소유하고 있는 가호를 뜻하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호구 조사에 대한 제도가 제대로 정비되기 시작한 조선시대에는 간지(干支)가 자(子)·묘(卯)·오(午)·유(酉) 등에 해당하는 식년(式年)마다 전국의 호구를 조사하는 것을 규정으로 삼았다. 이에 조선 왕조는 3년마다 전국의 호구 수를 조사하여 왕에게 보고하였다[『현종실록』 13년 10월 30일].
호구 파악의 방식은 핵법(覈法)과 관법(寬法)의 두 가지 기준을 적용하였다. 핵법은 단 1호 및 1구도 호적에서 누락시키지 않는 것으로 이는 호구 조사의 원칙이었다. 반면 관법은 각 호·구의 형편 및 향촌 사회의 현실을 감안하여 모든 호와 구를 반드시 찾아내지 않고 호적에 다 기록하지는 않는 것을 의미했다.
조선초에는 대체로 핵법을 적용하여 인민이 불법적으로 유망(流亡)하여 호구 수가 감소할 경우 가장(家長) 및 통수(統首), 이정(里正), 수령(守令) 등에게 징벌을 가하였으나[『태조실록』 2년 11월 28일], 이후부터는 관법의 방식이 적용되어 ‘호총제(戶摠制)’와 ‘구총제(口摠制)’로 실현되었다[『영조실록』 11년 윤4월 15일]. 이러한 변화는 양반 신분층을 제외한 대다수 백성들의 경제적 형편이 국가의 수취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기 때문이었다. 과중한 세금 부담을 견디지 못한 하층민 호구가 도망(逃亡)·피역(避役)하는 현상이 확대되자 현실을 인정한 궁여지책으로써 관법을 적용한 것이다.
한편, 수령으로서 힘써야 할 7가지 업무인 수령칠사(守令七事) 가운데 호구 수를 늘리는 ‘호구증(戶口增)’이 들어 있듯이 호구 수를 증대시키는 일은 고을 수령의 주요 업무였다. 또한 호구 수를 늘리지 못하는 경우 수령은 고과(考課)에서 낮은 평가를 받았다. 이에 호구 조사 때 거짓으로 자기 고을의 호구 수를 늘려 보고하는 폐단이 나타나기도 했다[『영조실록』 41년 6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