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헌릉은 경기도 광주군에 위치한 대모산(大母山)에 조성되었으며, 오늘날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에 위치하고 있다. 헌릉은 1420년(세종 2) 원경왕후가 승하했을 때 처음 조성되었고, 1422년(세종 4) 태종이 승하하여 이곳에 안장되면서 쌍릉이 되었다.
[조성 경위]
1420년 원경왕후가 사망하자 세종은 당일로 국장도감(國葬都監)을 설치했는데, 제릉(齊陵)과 건원릉(健元陵)을 조성한 박자청(朴子靑)이 산릉도감(山陵都監) 제조(提調)로 참여했다[『세종실록』 2년 7월 10일]. 이때 상왕이었던 태종은 4도감 12색을 설치하여 국장을 진행하던 방식을 바꾸어 3도감인 국장도감, 빈전도감, 산릉도감만 설치하고 나머지 업무는 각 사(司)에서 담당하도록 했다[『세종실록』 2년 7월 19일].
이후 1422년 5월 10일 태종이 사망한 당일에 삼도감(三都監)이 설치되었으며 이번에도 박자청은 산릉도감 제조가 되었고, 산릉을 조성할 인부는 수군 1,000명, 도성 내에서 1,000명, 가까운 도에서 2,000명을 동원하고 수레를 끄는 소 수백 마리를 사용하여 인력을 대신하게 했다[『세종실록』 4년 7월 12일]. 헌릉은 태종과 원경왕후 봉분이 따로 조성되어 있는 쌍릉 형식인데, 난간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봉분 주변으로 석양, 석호, 곡장을 둘렀다. 능 앞의 석물들은 고려의 현릉과 정릉의 형식을 본떠 조성하였으며 망주석을 제외하고는 모두 한 쌍씩 배치하였다.
[조성 상황]
『세종실록』에는 헌릉의 조성 과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특히 석실의 규모와 구조, 석실에서 봉분에 이르기까지 왕릉을 조성하는 모든 방법이 설명되어 있다[『세종실록』 2년 9월 16일][『세종실록』 4년 9월 6일]. 이를 정종의 후릉(厚陵)과 비교해 보면, 가치개석(加置蓋石)의 크기와 방석(旁石)의 개수만 다를 뿐 그 규모와 형태는 동일하다.
석실은 먼저 터를 정하고, 그 위에 금정기(金井機)를 설치하여 광중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한다. 그다음 광중 위에 능상각(陵上閣)이라는 가설물을 설치하고 외부에 노출되지 않도록 하였다. 광중의 깊이는 10척이며, 석실은 너비가 8척, 길이가 11척, 높이가 7척이다. 석실은 동쪽과 서쪽 벽면의 양방석(兩傍石)과 북쪽 벽면의 북우석(北隅石), 천장 역할을 하는 개석(蓋石), 개석 위에 놓는 가치개석 등으로 이루어지며, 문입석(門立石), 문역석(門閾石), 문비석(門扉石), 문의석(門倚石) 등은 입구에 위치한다. 또한 부재가 접하는 곳은 모두 유회(油灰)로 메우고, 석실 외부는 잡석과 흙을 채워 조성한다.
『능원지(陵園誌)』에 따르면 헌릉은 능 아래 135보 거리에 정자각이 있었으며, 정자각을 중심으로 오른쪽 40보 지점에 수라청(水刺廳), 왼쪽 38보 지점에 수복방(守僕房)이 있었다. 신도비는 정자각 동쪽 80보, 홍살문은 동쪽 135보 거리에, 망료위(望燎位)는 뒤쪽 55보 거리에 각각 위치하였다. 1788년(정조 12)에 편찬된 『춘관통고(春官通考)』를 살펴보면 헌릉에 대해 말하면서 ‘연지(蓮池)’라는 제목은 두었으나, 구체적인 서술은 하지 않았다.
한편 『헌릉지(獻陵誌)』에 따르면, 헌릉은 광주부 서남쪽 20리 지점에 있었다. 대모산이 주산이며, 동쪽으로 세천(洗川)까지는 1리, 서쪽 신원(新院)까지는 2리, 남쪽 달의천(達義川)까지는 5리, 북쪽 한성까지는 35리 거리였다.
[변천]
정자각은 1422년(세종 4) 9월에 축조하며, 1494년(성종 25) 6월에 수리하였고, 1664년(현종 5) 7월에 다시 중건되었다. 최근 1973년 헌인릉(獻仁陵) 재실을 보수하였으며, 1988년 정자각을 보수하는 등 헌릉의 개보수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관련 사항]
『세종실록』에는 조선초기 왕릉을 조영하면서 석실의 규모와 구조, 그리고 석실에서부터 봉분에 이르기까지의 조성 방법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세종실록』 2년 9월 16일]][『세종실록』 4년 9월 6일]]. 이 두 기록에 따르면, 광중의 깊이는 10척이며 각 부재의 맞춤과 이음 또는 결구를 통해서 상부나 측면의 토압, 행력으로부터 구조적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방식 등이 나타나 있다.
또한 능상의 병풍석은 지대석(地臺石)에 복련(覆蓮)을 새겨 설치하고 지대석 위에 열두 방위를 따라 지면석(地面石) 12개를 설치한다. 그 위에 우석(隅石)과 만석(滿石), 인석(引石)을 각각 12개씩 차례로 쌓아 올린다. 병풍석 주변에 있는 난간석은 지대배석(地臺排石)을 놓고, 그 위에 우석과 석주(石柱), 동자주석(童子柱石) 등을 설치한다. 이러한 조성 방법은 제2대 정종과 안정왕후의 후릉을 비롯해, 제3대 태종과 원경왕후의 헌릉 등에도 사용되었다. 특히 두 왕릉은 석물과 일부 부재의 개수만 다를 뿐, 석실의 규모와 형태, 난간석 등이 모두 동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