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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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통(許通)

서지사항
항목명허통(許通)
용어구분전문주석
관련어서얼금고법(庶孼禁錮法), 서얼차대(庶孼差待), 납속허통(納贖許通), 양출(良出), 천출(賤出)
분야사회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 과거 응시 자격, 일정 품계나 직첩에 대한 제한을 풀어주는 것.

[개설]
허통(許通)은 과거 응시나 관직의 진출 및 승진 등에 적용된 제한을 풀어주는 것을 말한다. 서얼의 과거 응시를 막았던 서얼금고법(庶孼禁錮法)을 풀어 준 일련의 정책을 서얼허통이라 칭하면서, 허통의 용어가 활발하게 사용되었다. 서얼은 조선후기 국가의 허통책(許通策) 실시와 자발적인 허통 운동의 결과 숙종대에 완전 허통을 이루었다. 그러나 향촌 사회에서의 현실적 허통에 이르기까지는 그 이후에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용 및 특징]
양반 사족의 자식이지만 적처(嫡妻) 소생이 아닌 첩(妾) 소생을 서얼이라 칭한다. 이 중에서도 양출(良出) 즉 양인 신분을 가진 첩의 소생이면 ‘서(庶)’, 천출(賤出)이면 ‘얼(孼)’이라 한다. 1415년(태종 15)에 서선(徐選) 등이 태종에게 종친 및 각 품관의 서얼 자손을 현관(顯官)에 임명하지 말 것을 건의하면서 서얼차대(庶孼差待)가 시작되었다[『태종실록』 15년 6월 25일]. 그러나 이것은 현관에 임명하지 않을 뿐이지 과거 응시 자격 자체를 박탈하는 완전한 금고(禁錮)는 아니었다.

『경국대전』에 서얼 자손에게는 문과·무과와 생원·진사시의 응시를 불허하는 서얼금고법이 수록되면서, 서얼이 과거에 응시하고 이를 통해 사로(仕路)에 진출하는 것이 완전히 막혀 버렸다. 하지만 대전(大典) 반포 시에는 서얼의 자손, 즉 자(子)와 손(孫)에게만 금고가 해당되고, 증손(曾孫) 이후는 허통이 가능했다. 그런데 그 이후 자손을 자자손손(子子孫孫)으로 해석하게 되고, 이것이 1555년(명종 10)의 『경국대전주해』에 명문화되어 대대로 과거 응시와 출사(出仕)가 막히게 되었다.

그렇다고 서얼의 관직 진출이 완전히 막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부조(父祖)가 양반 관료인 경우 서얼도 음덕(蔭德)으로 관직 진출이 가능했다. 단, 이때 이들은 한품서용(限品敍用)되어 요직에의 진출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뿐만 아니라 적용 대상은 2품 이상 관료의 첩자손으로 제한하여 3품 이하의 자손에게는 혜택이 돌아가지 않았다.

서얼에 대한 금고가 견고해지고 반대로 서얼의 수는 증가함에 따라 서얼금고법에 대한 반대 논의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시기는 정치·경제·사회·군사 등 여러 방면에서 사회의 기본 토대가 흔들리기 시작한 임진왜란 전후였다. 그 이전에는 공식적으로 서얼 허통이 이루어진 적은 없었다. 서얼 출신인 유자광(柳子光)이 개인적인 공훈으로 권세를 누린 일이나, 윤원형(尹元衡)이 첩을 정처(正妻)로 삼고 서자(庶子)를 적자(嫡子)로 하여 허통시킨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으나 이는 개인적인 특수한 허통 사례일 뿐이다.

16세기 말에 가서야 국가적 차원에서 다양한 허통책이 나오기 시작했다. 임진왜란 전후에 실시한 납속허통(納贖許通)이 대표적이다. 군량미 부족을 해결하기 위한 납속책의 일환으로 서얼이 재물을 바치면 허통을 허락하는 납속허통책을 실시한 것이다. 서얼이 납속 허통 후 등과(登科)하면 봉상시(奉常寺)·교서관(校書館)에 제직할 수도 있었다. 이 납속허통책은 임진왜란 후에도 수시로 실시되었다. 전란의 와중에 군공(軍功)에 따른 허통책도 실시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적의 머리 1급(級)이면 허통해 주었고, 사살한 경우 4명을 사살하면 1급을 참(斬)한 것으로 판단하였다[『선조실록』 26년 3월 21일]. 또 군공을 세운 이들을 대상으로 참수무과(斬首武科) 등을 설행하여 무과 급제의 길을 열어 주기도 하였다.

국가에 의한 다양한 정책으로 허통이 되었던 이 시기와 달리 인조대 이후에는 서얼 층이 단합하여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허통을 위한 운동을 벌였다. 당쟁에의 참가를 통한 정치 운동, 집단 상소(上疏) 등을 통해 전면에 나서서 서얼 신분을 대변하였다. 개별적으로는 납속허통책에 응모하는 활동도 이어졌다. 숙종대에 서얼금고법이 사실상 폐지되어 완전 허통을 이루었고, 영·정조대에는 청직(淸職)과 부사·목사 등 외직에의 임명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지속적인 서얼 허통에도 불구하고 향촌 사회 내부에서, 또는 친족 집단 내에서의 서얼차대는 그 후에도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오히려 서얼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하면 할수록 친족 집단 내에서 적서의 구별 의식은 더욱 강화된 측면도 있다. 이는 허통 정책이 양반 사족의 폭넓은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유교 사회의 강고한 신분제 이념을 뛰어넘지 못하는 관념상의 한계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변천]
임진왜란 등 전란기에는 국가의 재정적 필요 등에 의해 허통이 추진되었다면, 인조대 이후에는 서얼들의 자발적인 허통 노력에 국가가 부응한 측면이 있다. 1625년(인조 3)에 양출(良出)은 손자, 천출(賤出)은 증손 때부터 허통할 수 있게 되었고, 허통 후 등과하면 요직에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1696년(숙종 22)에는 금고법이 사실상 폐지되어 서얼의 완전 허통을 이루었다. 1708년(숙종 34)에는 서얼과 관련하여 호칭이 정리되었는데, 서얼 본인의 당대만 업유(業儒)·업무(業武)를 칭하다가 아들대부터는 유학(幼學)을 칭할 수 있게 되었다.

영조대에는 지평·정언 등 청직(淸職)을 제수 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1777년(정조 1)부터는 부사(府使)·목사(牧使) 등의 외직에 선임될 수 있었다. 또한 향촌 사회에서는 수임(首任)을 제외한 향임(鄕任)·유임(儒任)에 선임될 수 있었다. 1779년(정조 3)에는 검서관(檢書官) 제도가 마련되어 그 자리에 서얼이 임명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경국대전주해(經國大典註解)』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배재홍, 「조선 후기의 서얼 허통」, 『경북사학』10, 1987.
■ 배재홍, 「조선 후기의 서얼 허통과 신분 지위의 변동」, 경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 이상백, 「서얼금고(庶孼禁錮) 시말(始末)」, 『동방학지』1, 1954.
■ 이태진, 「서얼차대고(庶孼差待考): 선초 첩자(妾子) ‘한품서용(限品敍用)’제의 성립 과정을 중심으로」, 『역사학보』27, 1965.

■ [집필자] 문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