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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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행(行幸)

서지사항
항목명행행(行幸)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국왕정무(國王政務)
하위어능행(陵幸), 미행(微行), 수궁대장(守宮大將), 온행(溫行), 원행(園行), 유도대신(留都大臣), 유도삼대장(留都三大將), 유영대장(留營大將), 유주대장(留駐大將), 유진대장(留陣大將), 잠행(潛行), 정리사(整理使), 지송(祗送), 지영(祗迎), 행궁(行宮), 행재소(行在所)
동의어순수(巡狩), 순행(巡幸)
관련어거가(車駕), 거동(擧動), 노부(鹵簿), 대가(大駕), 법가(法駕), 소가(小駕), 친림(親臨), 친행(親行), 행차(行次)
분야문화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왕이 궁궐이나 도성 밖으로 거둥하던 일.

[개설]
행행(行幸)은 전통시대 중국에서 천자가 영토 내의 각 지역을 위무하며 다니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때 천자의 거가(車駕)가 이르는 곳에서는 모두 행복을 입는다고 보았으며, 그 지역의 백성들도 거가가 임하기를 원하여 그 덕택을 입는다고 하였다. 행행이 역사 기록으로 처음 등장하는 것은 하·은·주시대이다. 당시 천자가 제후를 만나러 가는 것을 순수(巡狩)라 하고, 제후가 천자를 뵈러 가는 것을 술직(述職)이라고 하였다. 천자는 5년마다 순수를 하였으며 제후는 4년마다 술직을 하였다. 군주는 순수를 하면서 각 지방의 관리와 백성들을 시찰하는 한편으로 그들의 고충을 듣고 위로하였다. 중국 천자가 시행한 행행의 기원과 유래는 오례(五禮)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오례의 기본적인 내용은 제왕이 궁궐 밖으로 나가 의례를 주관하는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사에서 왕의 행행은 삼국시대부터 나타나며 그것은 고려에 계승되었다. 고려시대 왕의 행행은 오례 중에서도 길례(吉禮)를 중심으로 하는 유교적 국가 의례가 대부분이었다. 예컨대 『고려사』 「지(志)」에는 왕의 능행(陵幸)에 대하여 “왕이 능에 참배하기 위해 출발하기 하루 전에 태묘에서 아뢰기를 평상시의 의식대로 하며, 담당 관사는 미리 참배할 능과 능실(陵室) 안을 정결하게 소제하여 정숙하게 하고, 상사국(尙舍局)은 능의 근처에 행궁을 마련하고 평상시의 의식과 같이 왕의 자리를 깐다.”는 규정이 있다.

고려시대 왕이 능행하는 이유는 물론 능에서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였는데, 고려시대의 능 제사는 오례 중의 길례에 해당했다. 고려시대에는 원구단 제사를 위해서도 왕이 행행하였다. 이외에도 오례와 관련하여 다양한 종류의 행행이 거행되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명확한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반면 조선시대에는 오례와 관련된 왕의 행행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울러 오례와 관련된 의식 절차도 자세하게 기록되었다. 우선 오례와 관련된 조선시대 왕의 행행은 오례의 중요성에 따라 대가(大駕), 법가(法駕), 소가(小駕)의 세 가지 의장(儀仗)으로 구분되었다.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禮)』에 의하면 왕은 조칙을 맞이할 때, 종묘와 사직에 제사할 때 대가 의장을 사용하였다. 이외에 문소전(文昭殿), 선농단, 문선왕에 제사할 때 그리고 사단(射壇)에서 활쏘기 할 때, 무과전시를 거행할 때는 법가 의장을 사용하였다. 반면 능 참배, 활쏘기 관람, 기타 대궐 밖 행행 때에는 소가 의장을 사용하였다.

위의 대가, 법가, 소가 의장을 조선시대의 오례와 관련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았다. 먼저 왕은 조칙을 맞이할 때, 종묘와 사직에 제사할 때 대가 의장을 사용하였는데, 조칙을 맞이하는 의식은 오례 중의 가례(嘉禮)였고 종묘와 사직에 제사하는 의식은 오례 중의 길례였다. 법가 의장이 사용된 문소전, 선농단, 문선왕의 제사 그리고 사단(射壇)에서의 활쏘기 및 무과전시의 거행 중에서 문소전, 선농단, 문선왕의 제사는 오례 중의 길례였고 사단에서 활쏘기 하는 의식은 오례 중의 군례(軍禮)였으며 무과전시 거행은 오례 중의 가례였다. 마지막으로 소가 의장이 사용된 능 참배, 활쏘기 관람, 기타 대궐 밖 행차는 오례 중의 길례, 가례, 군례, 빈례, 흉례 등이 두루 포함되었다. 결국 조선시대 왕은 오례를 거행하기 위해 수시로 궁궐 밖에 행행하였으며 동시에 오례를 거행하기 위해 다양한 종류의 행궁을 건설하였던 것이다. 조선시대 왕이 거행하였던 오례는 내치와 외교 등 통치 활동 전반을 포괄하였다. 따라서 조선시대 행행은 왕의 내치 및 외교와 관련된 통치 활동을 상징했다고 할 수 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는 왕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 집권 체제였으므로 중요한 국정 사항은 왕이 소재하는 궁궐에서 결정되었다. 조선시대의 행정제도, 국방 체제, 경제구조 등 대부분의 국가 제도는 왕이 소재하는 한양의 궁궐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이 같은 체제에서 왕이 도성 밖으로 나가는 상황은 국정 운영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조선시대에 왕이 도성을 떠나 성 밖으로 나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또는 이괄의 난과 같이 외침이나 내란을 당하여 수도가 함락되는 경우 왕은 부득이하게 도성을 포기하였다. 그러나 군사훈련, 온천 행차, 능행, 청나라 사신 영접 등을 위하여 평상시에도 왕이 도성을 벗어나는 일은 자주 있었다. 왕이 도성을 벗어나는 경우, 왕 자신의 호위를 비롯하여 수도 경비, 궁궐 수비 그리고 일상적인 국정 업무의 처리 등은 왕이 궁궐 안에 머물고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띨 수밖에 없다.

조선시대 왕이 도성 안에만 행차하는 경우, 예컨대 피접(避接)이나 구기(拘忌) 때문에 다른 궁궐로 옮기는 때, 대비 등이 다른 궁에 거처하여 문안을 위해 궁을 나설 때를 비롯하여 종묘, 사직, 성균관 등 도성 내의 각처에 제사를 드리거나, 중국 사신을 영접하기 위해 또는 종친 등 친척을 찾아가기 위해 궁궐을 벗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이 같은 경우는 대체로 당일로 입궁하기 때문에 출궁, 입궁, 호위 등 행차상의 절차와 목적지에서의 의식 등 의례상의 문제들이 제기되었다. 이에 비해 군사훈련, 능행, 원행, 온행 등을 위해 도성 문을 벗어나는 일도 적지 않았다. 이런 경우 당일로 환궁한다면 별 문제가 없지만, 짧게는 며칠 길게는 한 달 이상 도성 밖에, 또는 경기도 이외의 지역에 머물러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처럼 왕이 장기간 도성 밖이나 경기도 이외의 지역에 머물게 될 경우에는 의례상의 문제들 못지않게 궁궐 수비, 수도 방어, 각종 국정 업무 처리 등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될 수밖에 없었다.

왕의 행차에 따르는 기본적인 문제는 행차의 규모에 관한 것이었다. 왕의 행차는 그 종류에 따라 동원되는 의장물과 수행원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왕 행차는 그 종류에 따라 세 가지로 분류됨으로써, 행차 자체의 준비를 바로 할 수 있도록 하였다. 행차의 규모와 함께, 왕이 도성을 벗어나는 경우를 대비한 각종 제도들이『경국대전』에 산견되고 있다. 이에는 궁궐과 도성 수비 등에 관련한 것으로서 왕 부재 시 도성 수비 책임자인 유도삼대장(留都三大將), 도성 내외의 순찰 방법, 군호(軍號)를 받는 방법을 비롯하여, 행재 중인 왕의 호위 방법, 도성에 머무르는 신료들이 왕을 배웅하는 의식 등등이 포함되어 있다.

능행, 원행, 온행 등 왕의 행행이 결정되면 우선 정리사(整理使), 유도대신(留都大臣), 수궁대장(守宮大將), 유영대장(留營大將) 및 왕의 시위 병사들을 지휘할 대장과 수행할 인원 및 도성에 남을 인원이 정해졌다. 정리사는 보통 행행에 관련된 경비 관련 업무를 총괄하였다. 유도대신, 수궁대장, 유영대장은 궁궐과 수도 방위를 책임졌다. 호위대장은 왕의 호위 및 병사들을 통솔하였다. 정리사, 유도대신, 수궁대장, 유영대장, 호위대장 등은 보통 왕과 대신의 협의에 하여 선정되었다. 아울러 육조에서는 각각의 업무 내용에 따라 행차에 관련된 일을 수행하였다.

조선후기 5군영 체제에서 왕이 행행하게 되면, 하나의 군영이 왕을 호위하고, 나머지 군영은 비상 출동하여 궁궐과 수도를 수비하였다. 행행 중인 왕의 호위는 협련군(挾輦軍), 가전별초(駕前別抄), 가후금군(駕後禁軍) 그리고 선상군(先廂軍)과 후상군(後廂軍)이 담당하였다. 이들의 병력 수는 일정하지 않지만, 대체로 왕의 행차 종류에 따라 차이가 났다. 조선시대 왕이 행행하는 경우, 중요한 국정 사항은 왕이 소재하는 행재소에 연락하여 왕이 수행 신료들과 함께 의논하여 처리하였다. 그러나 중대사가 아닌 일반 업무는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궁궐의 승정원에 보고되었다. 행재소와 궁궐과는 긴밀한 연락을 위하여 일반적인 역로와 파발마 이외에도 당마를 설치하여 비상 연락을 담당하게 하였다. 조선시대 왕이 한양을 벗어난다는 사실은 그 자체가 비상사태였다. 그러므로 궁궐과 도성에 머무는 관료들과 병력들은 비상대기 상태로 근무하였다. 행행 중인 왕 또한 군사 행진의 형태로 행진하고 머물 때는 결진의 형태로 정지함으로써 계엄 상태를 유지하였다.

[변천]
조선시대 거가를 이용한 왕의 행행은 대한제국이 선포된 후 크게 변했다. 먼저 제후 체제가 황제 체제로 바뀌면서 거가에 수반되는 각종 의장물들이 황제의 의장으로 바뀌었다. 이와 함께 새로이 전차, 열차와 자동차 등 근대 교통 체계가 도입됨으로써 행행의 방식과 규모 역시 근대 교통 체계를 이용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예컨대 1909년 초에 거행된 순종의 남순행(南巡幸)서순행(西巡幸)에서는 궁정 열차가 이용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대한예전(大韓禮典)』
■ 김지영, 「조선후기 국왕의 행차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5.
■ 신명호, 「조선후기 국왕 行幸時 국정운영체제」, 『조선시대사학보』17, 2001.
■ 이왕무, 「대한제국기 純宗의 南巡幸 연구」, 『정신문화연구』 30-2, 2007.
■ 이왕무, 「조선후기 국왕의 陵幸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8.

■ [집필자] 신명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