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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임진왜란 초기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과의 전투를 통해 조총의 유용성을 확인한 조선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조총병인 포수 양성을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1593년(선조 26) 10월 포수 양성을 목적으로 훈련도감(訓鍊都監)을 설치하였다. 훈련도감을 통해 다수의 포수와 함께 근접전 전문 병사인 살수(殺手) 및 궁수인 사수(射手) 등 삼수병(三手兵)을 양성하였다. 삼수병 체제를 기본으로 하여 평안도 등 임진왜란 이후 재편된 지방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17세기 들어서면서 삼수병 가운데 포수의 비중이 이후 점점 커졌으며 조선후기 창설된 군영 중에서는 아예 살수나 사수가 없이 보병의 경우 포수로만 편성된 어영청(御營廳), 금위영(禁衛營)과 같은 군영도 있었다. 이는 조총의 개량과 함께 조선 포수의 능력이 뛰어난 것에서 기인한 것으로 명나라의 후금 공격인 심하(深河, [사르후]) 전투 당시에는 다수의 조선 포수들이 파병되었다. 따라서 17세기 후반이 되면 보병 중 살수가 편성된 곳은 훈련도감의 6초에 불과하였고 나머지 군영이나 지방군의 경우 살수가 편성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포수에게는 조총과 함께 근접전 무기인 환도(還刀)가 지급되었다. 포수는 19세기 중반 대원군 집정기에 더욱 중시되어 포수만으로 이루어진 다수의 지방 조총병대가 창설되어 병인양요 및 신미양요 당시에도 활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