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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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쇄(曝曬)

서지사항
항목명포쇄(曝曬)
용어구분전문주석
관련어실록(實錄), 족보(族譜)
분야교육 출판
유형의식 행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에 사고로 통칭된 사각(史閣)과 선원각(璿源閣)에 보관된 『조선왕조실록』과 왕실 족보 등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하여 정기적으로 말리던 일.

[개설]
사고에 보존된 『조선왕조실록』이나 문집 등 역사 기록은 습기가 차거나 좀벌레가 생기는 등의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고, 화재의 위험도 있어 정기적으로 사관을 보내서 말리고 보존 상황을 점검하였다.

대개 3년에 한 번 하는 정기 포쇄뿐만 아니라, 사안이 있어 『조선왕조실록』을 고출(考出)[참고로 살펴보기 위해 꺼내 보는 것]하거나 새로 봉안할 때도 반드시 상황을 점검하고 언제, 누가, 어떤 이유로 『조선왕조실록』을 보거나 꺼냈는지, 보존 상황은 어떠한지 기록하였는데, 이를 형지안(形止案)이라고 하였다. 규장각에 보관된 585종의 형지안 중 실록형지안이 357책, 선원록형지안이 201책이어서 형지안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형지안에는 각 사고별로 보관된 서책의 종류와 수량, 파견된 사관의 명단, 심지어 『조선왕조실록』과 함께 넣었던 약품이 기록되어 있어서 조선 시대 사고에 보관된 역사 기록에 대한 관심을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포쇄는 일정한 시기가 정해져 있지 않았으나, 대개 따뜻한 봄인 3~4월이나, 여름 장마가 지나고 맑은 날씨가 많은 가을 8~10월에 시행하였다. 날짜는 미리 길일을 택하였고, 포쇄하러 갈 때 관상감 관원을 대동하였다.

[연원 및 변천]
사고에 보관된 서적을 포쇄하는 일은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었다. 고려 때에는 직사관(直史館)이 포쇄를 담당하였는데, 궁성 또는 개경에 있는 사고와 지방의 사고에 사관을 보내 포쇄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합천 해인사에 있던 사고로 포쇄하러 가는 사관에게 송별시를 주어 위로하는 몇몇 시서(詩序)가 남아 있다. 포쇄는 경기도 안성의 칠장사(七長寺)나 충주 개천사로 옮긴 뒤에도 계속되었다.

조선은 개국 직후부터 고려의 포쇄제도를 답습하여 한양 춘추관과 지방 사고에 사관을 파견하여 보관된 서적을 포쇄하였다[『태종실록』16년 7월 21일]. 이런 포쇄의 전례는 그대로 조선시대로 이어졌다[『성종실록』5년 8월 13일].

정기적인 포쇄는 1446년(세종 28)에 3년에 한 번, 진(辰)·술(戌)·축(丑)·미(未)년에 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2년에 한 번 하기도 했고, 사정에 따라 5년이나 그 이상에 한 번 시행하기도 하였다. 3년 1회 규정은 1868년(고종 5) 5년 1회로 바뀌었다가, 3년 뒤 다시 10년 1회로 개정되었으나, 1898년(광무 2)부터 다시 3년 1회로 환원되었다.

[절차 및 내용]
조선후기 『조선왕조실록』 포쇄를 살필 수 있는 『한원고사(翰苑故事)』에는 자세한 포쇄식이 전해진다.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조선왕조실록』은 강화도 및 무주 적상산성, 봉화 태백산, 강릉 오대산의 네 곳에 보관하였다. 춘추관에 소장된 『조선왕조실록』은 병화(兵火)로 소실되고 선조 이후의『조선왕조실록』만 있었다. 각처 사고에 있는 『조선왕조실록』의 포쇄는 매 2년에 1번 한다. 포쇄할 때, 한림 1명이 왕명을 받들고 내려가 사고 문을 연다. 이때 흑단령(黑團領)을 갖추고 사각(史閣) 앞에서 4배를 한다. 사고 문을 열고 봉심(奉審)한 뒤 궤짝을 열어 포쇄한다. 포쇄 기간을 적절하게 판단한다. 포쇄가 끝나면 궤짝에 넣고 다시 봉안한다. 이때는 4배를 하지 않았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포쇄를 다녀올 경우, 사관들은 왕래 사이에 있었던 일정과 사건, 상황을 종종 시나 일기 등의 기록으로 남겼다. 숙종 때 검열을 지낸 신정하(申靖夏)는 포쇄 기행문인 「태백기유(太白紀遊)」와 시문 「포사(曝史)」를 남겼다. 「태백기유」에는 1709년(숙종 35) 8월 15일부터 9월 13일까지 봉화 태백산에 있는 사고에서 포쇄한 상황을 두고, “연선대에서 포쇄를 하였다. 며칠 동안 날씨가 맑고 기온이 따뜻하여 구름 한 점 없었다. 종일 모포를 하고 섬돌에 앉아 책자를 포쇄하였다. 조용하여 사람 소리 없고 때로 날아가는 새가 그림자를 드리울 뿐이었다.” 하고 생생히 묘사하였다. 이렇듯 각종 문집에 남아 있는 포쇄 기록은 구체적인 포쇄 실상을 이해하는 좋은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 『경종대왕실록산절청등록(景宗大王實錄刪節廳謄錄)』
■ 『영종대왕실록청의궤(英宗大王實錄廳儀軌)』
■ 『순종대왕실록청의궤(純宗大王實錄廳儀軌)』
■ 오항녕 역, 『(국역)영종대왕실록청의궤 (상)』, 민족문화추진회, 2007.
■ 오항녕 역, 『(국역)영종대왕실록청의궤 (하)』, 민족문화추진회, 2008.
■ 신병주, 「‘실록형지안’을 통해 본 『조선왕조실록』의 관리 체계」, 『국사관논총』102, 2003.
■ 신병주, 「『조선왕조실록』의 봉안의식과 관리」, 『한국사연구』115, 2001.
■ 오항녕, 「실록의 의례성에 대한 연구-상징성과 편찬관례의 형성 과정을 중심으로」, 『조선시대사학보』26, 2003.
■ 조계영, 「조선시대 실록부록의 편찬과 보존-『단종대왕실록부록』을 중심으로」, 『한국문화』62, 2013.

■ [집필자] 오항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