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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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호(土豪)

서지사항
항목명토호(土豪)
용어구분전문주석
하위어품관토호(品官土豪), 양반토호(兩班土豪), 향곡토호(鄕曲土豪), 재지토호(在地土豪)
관련어호강(豪强), 호족(豪族), 호협(豪俠), 세가(勢家), 거실(巨室)
분야사회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국가 권력과 어느 정도 대립적인 위치에 있으면서 향촌에 토착화한 재지(在地) 지배 세력.

[개설]
토호(土豪)는 향촌에 토착화한 재지 지배 세력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토호라는 용어는 대체로 조선 사회에 들어와서 보편적으로 쓰이기 시작하였다. 토호는 호강(豪强)·호족(豪族)·호협(豪俠)·세가(勢家)·거실(巨室) 등 다양한 표현으로 불리기도 했다.

토호의 특징으로 흔히 불법적인 무단 행위가 지적되고 있듯이 토호는 국가 권력에 대립적인 존재였다. 국가 지배의 밖에 존재하면서 동시에 국가의 수취 기반을 불법적으로 침탈해 사적 이득을 채우는 계층이 토호층이었다. 그러나 토호가 국가 권력과 일방적으로 대립적인 위치에만 있었다면 그 권한의 행사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다. 토호의 무단 행위는 중앙 정계나 지방 권력층과의 결탁을 통하여 가능했다.

이렇게 일반적으로 불법적인 재지 세력을 토호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은 신분층이나 지역적 성격과 연결되어 품관토호(品官土豪), 양반토호(兩班土豪), 향곡토호(鄕曲土豪), 재지토호(在地土豪) 등으로 불렸다.

[내용 및 특징]
조선초기의 토호는 농장이나 논밭을 소유하고 양민을 불법 점거하여 수세와 부역의 대상에서 이탈시키던 부류로서, 이러한 지방의 분산적 토호 세력은 중앙 집권 체제의 안정적 정비를 위해 견제 대상이 되고 있었다. 1524년(중종 19)의 「토호품관추쇄사목(土豪品官推刷事目)」은 이러한 정책의 반영이었다.

18~19세기의 토호는 대부분이 신분적으로 양반층이었기 때문에 양반토호(兩班土豪)라고 불렸다. 이들은 중앙의 노론 척신(戚臣) 세력과 결탁하여 국가 권력의 비호 하에 수령권을 압도하면서 향촌 사회에 군림하던 층이거나, 중앙 정계에 진출하지 못하여 향촌에 토착하면서 재지 권력화한 사족 집단이었다. 전자는 경기도와 충청도, 후자는 경상도와 전라도 토호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1867년(고종 4) 암행어사 토호별단(土豪別單)에 오른 자들 가운데에는 세도 가문의 인물들도 일부 포함되어 있었다. 지방의 토호 세력은 세도 정권을 뒷받침하는 사회적 기반이기도 하였다. 토호의 무단적 행동을 가능하게 한 배경으로는, 가세(家勢)나 가문을 바탕으로 한 지역을 장악하는 경우[專掌一域], 수령 및 이향(吏鄕) 층과 결탁하는 경우[結官符吏], 서원이나 향교 등의 기구를 이용하는 경우[依勢校院] 등이 있었다.

[변천]
조선시대 태조대부터 고종대까지 지속적으로 토호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따라서 토호라는 용어 자체는 비역사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대에 따라서 ‘토호’에 대해 사용하는 용법이 약간씩 달랐다.

조선초기인 1410년(태종 10)에는 토호가 향원(鄕愿), 교활한 아전, 간사한 백성과 마찬가지로 혹 태장(笞杖)을 받거나 부역(賦役)에 시달리면 도리어 수령을 원수로 생각하여 밤낮으로 수령을 중상모략 하는 존재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서 향원은 각 향리(鄕里)에서 겉으로는 덕이 있는 사람인 체 행동하면서 실제로는 사람들을 속여 실속을 채우던 악덕 토호를 말한다[『태종실록』 10년 4월 8일].

제주나 동북면(東北面)과 같은 지역에서는 토호가 토지와 인민을 광점(廣占)하여 국가에 대립적인 존재로 있으면서, 대를 이어서 부자(父子)가 지역을 지배하고 있다고 이해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 정부는 이들에 대한 억압책을 고심하였다[『태종실록』 13년 7월 12일] [『태종실록』 13년 8월 6일] [『세종실종』 9년 6월 10일]. 토호는 토지를 널리 점유하고 백성들을 숨겨서 그들을 사사로이 노예처럼 부리거나 첩(妾)으로 삼았다[『세종실록』 20년 11월 23일].

전라도의 토호는 넓게 울타리를 치고 양민을 숨겨서 세종대에 그 폐단을 크게 개혁하였는데, 그 후에도 토호가 아직 그대로 있어서 한 읍에 노복을 500여 명이나 점유하는 경우도 있었다[『성종실록』 5년 3월 20일]. 영안도의 경우에도 토호가 양민을 다수 점거하면서 이들을 정부가 자신들에게 사역인(使役人)으로 정해 준 ‘세전관하(世傳管下)’라고 칭하면서 노비처럼 부린다고 지적하였다[『성종실록』 18년 2월 5일].

이러한 토호의 폐단은 결국 중종대에 「토호품관추쇄사목」을 만들게 하였다. 전라도 남원이나 몇 개 지역의 불법 토호들의 행위가 국가에 보고되고, 이들 불법 토호들을 추쇄하여 변방으로 주거지를 강제로 옮기도록 하는 사민(徙民) 정책이 세워지게 된 것이다. 즉 공채(公債) 25석 이상을 납부하지 않은 자는 북방으로 보내도록 하였다[『중종실록』 38년 10월 13일].

그러나 이러한 불법적인 토호는 형태를 바꾸어 가면서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조선후기 현종대에는 품관이 관직을 끝낸 후에 관비(官婢)를 첩으로 맞는 경우에는 토호로 논한다고 하였는데[『현종개수실록』 6년 2월 29일], 이는 토호를 억제하는 규정이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 고석규, 「19세기 전반 향촌 사회 지배 구조의 성격: 「수령-리·향 수탈 구조」를 중심으로」, 『외대사학』2, 1986.
■ 곽동찬, 「고종조 토호의 성분과 무단 양태: 1867년 암행어사 토호별단의 분석」, 『한국사론』2, 1975.
■ 이세영, 「18·19세기 우반 토호의 지주 경영」, 『한국문화』6, 1985.

■ [집필자] 김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