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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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당대(春塘臺)

서지사항
항목명춘당대(春塘臺)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창경궁(昌慶宮), 창덕궁(昌德宮)
동의어춘대(春臺)
관련어과거(科擧), 군사훈련(軍事訓鍊), 기우제(祈雨祭), 동궐(東闕), 망배례(望拜禮), 서총대(瑞葱臺), 열무(閱武), 영화당(暎花堂), 후원(後苑)
분야왕실
유형건축·능 원 묘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창덕궁 후원 안에 있는 넓은 석대.

[개설]
서총대(瑞蔥臺)와 더불어 궁궐 후원 안의 공터에 쌓은 석대이다. 서총대는 연산군대에 조성되고 이름이 붙어 분명한 조성 연대가 나와 있다. 그러나 춘당대는 조성 연대를 알 수 없으며 조선초기에 이미 조성되었고 널리 쓰였던 장소인 것으로 보인다. 1503년(연산군 9)에 후원 춘당대의 돌을 갈고 고쳐 쌓으라는 전교를 내렸다[『연산군일기』 9년 9월 10일]. 중종은 하교를 내려, 성종대에는 물론 이전 조종조에서도 후원 춘당대에서 종친과 더불어 잔치를 벌인 전례가 있으니 춘당대 진연을 시행하라고 하였다[『중종실록』 23년 8월 20일]. 춘당대는 종친, 신하 등과 잔치하는 곳임은 물론 선비를 시험 보고 무사를 사열하는 곳이기도 하다.

[위치 및 용도]
춘당대는 「동궐도(東闕圖)」상에서 규장각(奎章閣)·주합루(宙合樓) 남쪽에 있는 부용지 연못가 동쪽의 영화당(暎花堂) 앞마당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영화당은 궁궐의 여느 건물과 달리 동쪽을 바라보고 서 있는데, 그 동쪽에 펼쳐진 넓은 공터가 바로 춘당대이다. 춘당대는 대지의 격차가 높아 마치 축대 위에 서 있는 듯 보인다. 그 아래, 즉 동쪽 아래에 연못을 두고 있고 춘당대 터로 보이는 영역 안 북쪽에도 네모난 모양의 연못이 하나 더 조성되어 있다. 둘 중 어느 것을 명확히 춘당이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춘당대의 주변에 이외에도 많은 연못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기우제를 지내는 장소로도 쓰였다고 보인다.


[변천 및 현황]
조선초기부터 조성되었던 것 같으나 정확한 조성 연대는 알 수 없다. 현재도 창덕궁 후원에 남아 있다.

[형태]
넓은 석대이다.

[관련사건 및 일화]
연산군 이전에는 이 너른 마당을 ‘춘대’라고도 불렀던 듯하다. 성종시기, 사직단에 제사를 올리고 돌아오는 성종의 행차를 맞이하며 한 신하가 가요를 지어 바쳤다. 그 내용은, ‘왕의 수레가 돌아오는 것을 보며 상서로운 그림을 받들어 올리니 선녀가 옹위하는 듯하고 자신들은 태평성대 도읍에서 노닐고 춘대에서 쉰다.’라는 것이었다[『성종실록』 19년 윤1월 22일]. 효종대인 1654년(효종 5)에는 춘당대에서 세자에게 농사의 어려움을 보고 깨닫게 하였다면서, 춘당대 곁 연못가에서 농사를 짓기도 하였다. 영·정조 시기에는 춘당대에서 명나라의 신종황제(神宗皇帝)에게 망배례를 행하였다. 춘당대는 훈련을 마친 군사들과 과거시험에 당선된 유생들에게 식당을 열어 음식을 베풀고 위로하였던 장소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궁궐지(宮闕志)』「동궐도(東闕圖)」

■ [집필자] 조옥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