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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초혼(招魂)의 사전적 의미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죽은 혼을 부른다’는 의미가 있고, 둘째는 ‘사람이 죽었을 때 지붕에 올라서서 그 사람이 생시에 입던 저고리의 깃을 왼손으로 들고 오른손으로는 허리 쪽을 들고 북쪽을 향해 흔들면서 죽은 혼을 부르는 상례 절차의 하나’를 뜻한다.
첫 번째 의미의 초혼은 『초사』에 처음 나오는데, 중국 초나라의 민간에서 불리던 「초혼가(招魂歌)」 형식을 본뜬 것이다. 두 번째 의미의 초혼은 상례 절차의 하나로서, 시자(侍者)가 죽은 자의 윗옷을 들고 앞쪽의 동쪽 처마를 거쳐 지붕의 중류(中霤)에 올라가 북쪽을 바라보면서 옷을 흔들며 세 번 복(復)을 외치며 부르는 행위이다. 복이란 사람이 죽으면 곧바로 그의 옷을 공중에 내저으면서 ‘아무개’하고 세 번 부르는 것을 말한다. 혼이 옷을 보고 돌아와서 몸에 다시 붙어 살아나기를 바라는 뜻에서 행하는 절차이다.
거애(擧哀)란 상사(喪事)가 났을 때 초혼을 하고 나서 상제가 머리를 풀고 슬피 울어 초상난 것을 알리는 발상의식(發喪儀式)이다. 창혼(唱魂)은 변사한 잡귀들의 혼을 부르는 무당들의 행위로 첫 번째 의미의 초혼이다. 초혼제는 돌아가신 부모의 혼을 부르거나 억울하게 죽은 잡귀의 혼을 불러 지내는 제사다.
[연원 및 변천]
1458년(세조 4)에 왕이 사헌부의 계청(啓請)에 따라, 민간에서 초혼이라고 핑계를 대며 중을 불러들여 떡과 과일을 마련하고 길가에다 깃발을 늘어놓는 것을 금하고 어기는 경우 중과 가장(家長)을 모두 처벌하라고 명하였다. 『국조오례의』에는, 왕실에서 행하는 두 번째 의미의 초혼 절차에 대해서 "내시를 시켜서 호복(呼復)한다."고 적고 있다. 호복이란 초혼 의식을 말하는 것으로, 고복(皐復)이라고도 하였다.
초혼장(招魂葬)이란 천재·지변·전쟁 등으로 죽은 이의 시신을 거둘 수 없을 때 그 죽은 이의 혼을 불러들여 입던 의복과 같이 장사지내는 것으로, 의대장(衣帶葬)이라고도 한다. 1424년(세종 6) 10월 7일 전라도처치사가, 왜적을 부도(釜島)에서 추격하다가 군관 세 사람이 살해되고 선졸(船卒) 네 명이 물에 빠져 죽었다고 보고하자, 전망인(戰亡人)에게 초혼제(招魂祭)를 지내게 하고 군관에게는 각기 쌀과 콩 10섬씩을, 선졸에게는 6섬씩을 주고 그 집은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또 일본 회례사 박안신(朴安臣)이 거느리고 간 선군(船軍) 중 사망한 16명의 초혼제도 지내게 하였다[『세종실록』 6년 10월 7일].
장충단(獎忠壇)은 본래는 초혼단(招魂壇)이었다. 1895년(고종 32)에 을미정변 때 순사한 궁내부 대신 이경직(李耕稙), 시위대장 홍계훈(洪啓薰) 등 충신열사의 넋을 제사지내기 위해 만든 시설이다.
[절차 및 내용]
김성일(金誠一)이 남긴 『학봉집』 6권 잡저에 "(중략) 혼백을 하는데 초혼한 옷을 상자에 담고 비단을 묶어서 신(神)이 의지하게 한다."고 하였다. 초혼한 옷에 죽은 자의 혼이 실려 있을 것이라는 관념을 읽을 수 있다. 또한 성재(省齋) 신응순(辛應純)이 쓴 『내상기』는 일기 형식으로 상례의 절차를 구체적으로 전해 주고 있다. 신응순의 처 서산유씨는 1571년 9월 26일에 태어나 1615년 5월 28일에 죽었다. 다음은 당일의 일기다.
"(중략) 마침내 깨어나지 못했다. 출산을 시작한 지 겨우 한 식경이 지난 때였다. 첫닭이 울자 초혼을 하였다. 늙은 종 독운(禿云)에게 지붕에 올라가 초혼을 시켰다. 그러고는 계집종들에게는 집을 둘러싸며 두세번 돌며 초혼을 시켰다. 며느리의 출산일이 곧 다가오므로 놀라지 않도록 주의를 주었다."
유교에서는 저승을 설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조상의 제사가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매개라는 설명은 설득력이 없다. 무속에서 사람이 죽으면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데, 무당이 창혼, 즉 망자의 혼을 불러 그의 언어와 행동을 연출하고 사람들은 이를 보고 신이 내렸다고 하는 것에 대해 유가들이 매우 설만(褻慢)하고 불경스러운 일로 본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서애 유성룡(柳成龍)은 『서애집』에서 7월 15일은 세속에서 백종(百種)이라 하여 시골 백성들이 부모를 위해 초혼, 즉 영혼을 불러다가 제사를 지낸다고 적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