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내용]
담비는 식육목(食肉目) 족제비과에 속하는 산짐승으로 담부라고도 하며, 한자어로는 산달(山獺)·초(貂)라고 한다. 우리나라에 서식하는 담비에는 산달과 검은담비 2종이 있다. 담비의 모피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발해는 외국과 많이 교류했는데 727년(발해 무왕 9)에 담비 가죽 300장, 739년에 호랑이 가죽으로 추정되는 대충피(大蟲皮) 7장·곰 가죽 7장·담비 가죽 6장 등을 일본에 보냈으며, 일본은 그 값의 몇십 배나 되는 시(絁)·사(絲)·면(綿)·포(布) 등을 발해에 보내왔다.
고려시대는 이리 가죽·오소리 가죽·고양이 가죽·고라니 가죽·담비 가죽·수달피·호랑이 가죽·표범 가죽·곰 가죽·염소 가죽 등의 다양한 가죽과 동물을 수출하였고, 표범 가죽·소가죽·담비 가죽·수달피·호랑이 가죽·쥐 가죽 등을 수입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는 방한모인 남바위, 풍차, 갖저고리 배자, 토시 등의 가장자리를 장식하는 데 담비 털가죽인 초피(貂皮)를 사용하였다.
초피는 모피류 중 최상에 해당하는 것으로 평안도와 함경도의 토산품이기는 하지만, 대부분 여진(女眞)으로부터 얻었다. 1416년(태종 16)에는 직무에 성실한 조말생(趙末生)에게 초피구(貂皮裘) 1령(領)을 하사하였으며[『태종실록』 16년 11월 30일], 1417년(태종 17)에는 중국 사신에게 초피를 선물하는 등 예로부터 초피를 왕실 전용으로 여겨 왔으며[『태종실록』 17년 7월 30일], 산지에서는 토산품으로 진상하였다. 1407년(태종 7)에는 물량이 많지 않아 공물 충당에도 여러 번 감량하였으나, 초피의 무역은 줄지 않고 오히려 농기구나 철물 등을 주고 여진족으로부터 구입하기까지 하였다. 이는 풍속이 사치를 숭상하여 복식에 초피와 서피를 많이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당상관(堂上官) 이상만 초피를 사용할 수 있었고, 모구(毛裘)는 노인들만 쓰도록 하여 사용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나이 젊은 부녀자들도 모두 초구(貂裘)를 입는가 하면 수십 명이 참석한 모임에 이를 입지 않은 자가 한 사람도 없어 초구가 없으면 부끄럽게 여길 정도로 유행하였는데, 전래되는 유품 중 이북 지방의 털배자 또는 갖저고리와 유사한 형태로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