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조선시대에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초야에 묻혀 지내는 지식인을 처사(處士)라고 불렀다. 조선시대 성리학을 교양으로 삼았던 자들에게 관직자의 길과 처사의 길은 그들의 이념을 실천하는 데에 있어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길이었다.
[담당 직무]
처사는 후학의 양성과 향리(鄕里)의 풍속을 진작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고 이들은 비록 관직에 나아가지는 않았으나 상소 형태로 정치적 소견을 올리기도 하였고, 후기 사회에서는 산림(山林)이라는 이름으로 등용되는 제도가 마련되기도 하였다. 이들은 조선 사회에서 학파가 형성되는 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변천]
조선초기에는 관(官) 우위의 정책이 추진되었고,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서는 비록 학덕을 겸비한 처사라고 하더라도 우대를 받기 힘들었다.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의 특징적 요소라고 할 예학(禮學)이 발달하면서 각종 의례에서 관권 우위의 질서가 확립되었으며 의식주 역시 여기에 따라 규정되었는데, 세종대 예조(禮曹)에서는 시향(時享) 복장에 대해서도 주자의 『문공가례(文公家禮)』를 들어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문공가례』에 "정지(正至)·삭망(朔望)에는 참알(參謁)한다."고 하였고, 그 주(註)에는, "주인 이하는 성복(盛服)한다. 무릇 성복이란 것은 관작이 있는 이는 복두(幞頭)·공복(公服)·대(帶)·화(靴)·홀(笏)을 갖추고, 진사(進士)는 복두와 난삼대(欄衫帶)를 착용하며, 처사(處士)는 복두와 조삼대(皂衫帶)를 착용한다."고 하였다는 것이다[『세종실록』 10년 11월 16일]. 이와 같이 처사는 관직에 있는 사람과 차별화 되었다.
그러나 국가 이념인 조선의 성리학이 정착되는 과정에서 4대 사화(士禍)를 겪게 되었고, 이러한 정변을 겪으면서 처사로서의 생활을 지향하는 자들이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