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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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昌德宮)

서지사항
항목명창덕궁(昌德宮)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궁궐(宮闕)
관련어이궁(離宮), 경복궁(景福宮), 동궐(東闕), 법궁(法宮), 창경궁(昌慶宮)
분야왕실
유형건축·능 원 묘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전기 이궁으로 지어졌다가 17세기 이후 250여 년 동안 정궁으로 쓰인 궁궐.

[개설]
태종이 1405년(태종 5) 한양으로 재천도하면서 정궁이던 경복궁에 들지 않고 경복궁 동편에 새로 이궁(離宮)을 세워 이름을 창덕궁이라고 하였다[『태종실록』 5년 10월 25일]. 역대 왕들이 다른 궁보다 이곳을 좋아하였으며 17세기 이후에는 경복궁을 대신해서 정궁으로 사용했다. 동쪽에는 담을 사이에 두고 창경궁이 있어서 창덕궁의 부족한 공간을 채워 주었다. 조선후기에는 두 궁을 합해서 동궐(東闕)이라 불렀다.


도성 북쪽 응봉에서 내려오는 경사진 지형을 살려 지세에 맞추어 건물들을 지었다. 따라서 전체 건물 배치는 좌우 대칭을 피하고 크고 작은 건물과 마당들이 불규칙하면서도 서로 연속성을 갖고 이어지도록 구성하였다. 넓은 숲으로 이루어진 후원은 인공을 최소화하고 자연 상태의 언덕과 골짜기로 만들어졌으며 곳곳에 정자와 샘물이 마련되었다. 후원은 창경궁에서도 함께 이용했다.

[위치 및 용도]
경복궁의 동편에 있으며 도성 전체로 보면 중앙의 약간 북쪽에 위치한다. 조선초기 풍수가 중에는 주산인 백악(북악산)이 북서쪽에 치우쳐 있는 점을 결함으로 치고 남쪽 산인 목멱산(남산)과 마주하는 응봉(鷹峰) 아래를 명당으로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창덕궁이 바로 응봉 아래 궁궐이었다. 이런 주장은 임진왜란 이후 궁궐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창덕궁이 우선적으로 선택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종묘는 창덕궁과 언덕을 사이에 두고 이어져 있었다. 그 때문에 왕들은 궐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종묘에 갈 수 있었다. 왕이 궐 밖으로 나가는 일은 복잡한 절차와 많은 수행 인원을 대동해야 하는 번잡한 일이었으므로 이런 점에서도 창덕궁은 편리한 점이 있었다.

17세기 이후 경복궁을 대신해서 창덕궁이 정궁의 역할을 맡자 공간의 부족을 곁에 있는 창경궁을 함께 사용하면서 해결했다. 그 결과 두 궁궐을 통칭해서 동궐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그에 상응해서 도성 서쪽의 경희궁을 서궐(西闕)로 칭하여 조선후기의 역대 왕들은 두 궐을 오가며 정치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동궐이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1721년(경종 1)이며[『경종실록』 1년 11월 2일] 서궐은 1760년(영조 36)에 나타난다[『영조실록』 36년 10월 8일]. 뒤에 경복궁이 중건되자 북궐(北闕)이란 호칭을 붙였다[『고종실록』 37년 3월 23일].

[변천 및 현황]
이궁으로 출발한 창덕궁은 곧 건물이 비좁고 부족한 사태를 맞아 건물을 증축하고 영역을 넓혀 나갔다. 정전은 당초 정면 3칸으로 지었으나, 10여 년이 지난 1418년(세종 즉위)에는 5칸으로 증축하였다. 이후에도 여러 부속 전각들이 신축되었는데, 조선전기에 가장 이름난 건물은 연회를 베풀기 위해 지은 광연루(廣延樓)였다. 이 건물은 경복궁의 경회루(慶會樓)에 대비될 수 있는 창덕궁의 누각이었다.

임진왜란으로 도성 내 궁궐이 모두 소실된 후에 경복궁은 복구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창덕궁이 가장 먼저 복구되었다. 1609년(광해군 1)에는 정전 등이 갖추어졌고 1611년(광해군 3)에는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들어왔다. 이때는 복구를 통해 소실 이전 모습을 그대로 되살렸다고 전한다[『광해군일기』 3년 10월 4일].

이후 창덕궁은 잦은 화재와 재건을 거듭하였고 새로운 전각의 수요에 따라 신축되는 건물도 적지 않았다. 우선 화재에 따른 변화를 보면,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편전과 내전이 모두 소실되었다가 재건되었다. 이때는 인경궁의 전각들을 철거해서 그 재목을 활용했다. 인경궁의 편전인 광정전(光政殿) 재목은 선정전(宣政殿) 복구에 활용했는데, 광해군대에 광정전 지붕에 청기와를 얹었기 때문에 선정전도 청기와 건물이 되었다. 1803년(순조 3)에는 인정전(仁政殿)이 불에 타 이듬해에 다시 지었다[『순조실록』 3년 12월 13일]. 1834년(순조 34)에는 대조전(大造殿)을 비롯한 내전 대부분이 소실되어 그해에 복구하였다. 마지막 큰 화재는 1919년 내전 일곽이 불에 탄 것이며 경복궁의 전각을 철거해서 대조전, 희정당(熙政堂) 등을 다시 지었다. 이때 희정당은 모습이 크게 달라졌다.

새로운 용도에 따른 변화도 적지 않았다. 1658년(효종 8)에는 왕대비 처소를 새로 마련하기 위해서 만수전(萬壽殿)을 새로 지었는데, 동쪽에 대비전을 둔다는 전례를 깨고 인정전 서쪽의 도총부(都摠府) 자리에 세웠다[『효종실록』 8년 4월 2일]. 만수전이 화재로 소실되자, 숙종은 만수전 별당인 춘휘전(春輝殿)을 개조해서 왕의 초상화를 모시는 선원전으로 사용했다. 그때까지 창덕궁 안에는 왕의 초상화를 모신 건물이 없었는데, 이때 처음 나타났다. 이것은 왕의 위상을 높이려는 숙종의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정조는 동궁 정당이던 시민당(時敏堂)이 소실된 것을 계기로 새로 동궁전을 지어 중희당(重熙堂)이라 이름 지었다. 중희당 주변에는 왕세자의 서고와 부속 건물이 들어섰다. 이전에 시민당이 남쪽 후미진 곳에 있었던 데 비해 중희당은 창덕궁의 중앙에 위치했다.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한 정조의 의도가 엿보이는 조처였다.

헌종은 시민당 일곽이 있던 곳에 낙선재(樂善齋)를 지어 자신의 별당으로 삼고 그 곁에는 새로 맞은 후궁 경빈김씨(慶嬪金氏)가 머물 석복헌(錫福軒)을 지었다. 낙선재의 외관은 사대부 살림집 모습이었지만 내부는 헌종의 중국 문화 취향을 반영하여 만들었다.

후원도 크고 작은 변화가 따랐다. 인조는 후원 가장 깊은 곳에 옥류천을 개척해서 후원의 경역을 넓혔다. 1704년(숙종 30)에는 후원 서쪽에 대보단(大報壇)을 세웠다[『숙종실록』 30년 12월 21일]. 임진왜란을 도운 명나라 황제의 은혜를 갚는다는 의도였는데, 청나라를 반대하는 서인들의 정치적 입김이 작용한 결과였다. 정조는 후원 내 옛 서총대 일대에 왕실 도서와 서화 등을 보관하는 주합루(宙合樓), 열고관(閱古觀), 서고 등을 지어 후원을 단지 휴식처가 아니고 왕실의 유품과 서책을 보관한 곳으로 바꾸었다. 1827년(순조 27)에는 효명세자(孝明世子)가 순조와 왕비에게 존호를 올리는 행사를 벌이고 연회를 여는 장소로 연경당(延慶堂)을 지었고 주변에는 세자의 독서처인 의두합(儀斗閤)이 만들었다. 연경당은 나중에 왕의 초상화를 모시는 데 쓰였다. 이 건물들은 1865년(고종 2) 효명세자의 부인이며 당시 왕실 최고 어른이던 조대비(趙大妃)에 의해 전면 개축되어 연경당은 사대부 살림집 모습으로 고쳐지고 퇴락한 의두합도 다시 지어졌다. 이 과정에서 효종이 송시열(宋時烈)과 담화를 나누었던 전각인 어수당(魚水堂)이 사라졌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면서 창덕궁은 크게 달라졌다. 진선문(進善門) 등 중요한 출입 시설이 사라지고 진선문 북쪽의 관청들도 철거되었다. 관람객의 편의를 위한다는 명분이었다. 편전 주변도 건물이 철거되고 중희당도 사라졌다. 대보단이 철거되고 그 자리에는 신선원전(新璿源殿)이 들어섰다. 아울러 관람객들이 후원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진입로도 열렸다.

광복 이후에도 한동안 창덕궁은 단지 시민들의 휴식처로 인식되어 후원 영화당(暎花堂) 앞으로 관람의 경계를 나타내는 담장을 새로 쌓고 자동차 도로를 설치하는 등 훼손이 이어졌다. 1979년에 와서 일차적으로 궁궐의 정비가 이루어졌고 1998년부터 2003년까지 주요 전각의 복구가 추진되어 진선문과 주변 행각이 재건되고 궐내 각사도 복구되었다.

[형태]
1827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동궐도(東闕圖)」는 19세기의 창덕궁 전모를 알려주는 자료이다. 창덕궁은 시대에 따라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전체 궁장의 형태나 진입 방식, 중심 전각의 배치 등은 창건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창덕궁의 궁장은 경복궁처럼 네모난 형태를 취하지 않고 지형에 따른 불규칙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응봉에서 내려오는 산기슭과 남쪽의 종묘 언덕 사이 동서로 펼쳐진 좁은 평탄 지형을 이용해 궁의 중심부가 들어서 있다. 궁의 정문은 서남쪽 모서리에 치우쳐 있으며 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진입 방향이 꺾이면서 금천교를 지나 진선문 안으로 들어서고 다시 왼쪽으로 꺾여서 정전으로 향하게 된다. 남북 일직선상에 중심 전각이 놓이고 정북 방향으로 진입이 이루어진 경복궁과 대조적이다. 이처럼 정문에서 정전까지 두 차례 직각으로 꺾이는 진입 방식은 개경에 지었던 고려의 궁궐과 유사한 점이 있다. 조선시대에 만월대로 불리던 고려의 궁궐은 동남 모서리에서 시작된 진입이 한 차례 오른쪽으로 꺾여 나가다가 다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통상적인 정전 영역으로 나가도록 되어 있었다.


중심 전각의 배치는 정전의 측면에 편전인 선정전이 놓이고 다시 그 동편에 침전이 놓이는 방식이다. 이것도 정전, 편전, 침전이 남북 일직선상에 놓이는 경복궁과 다르다. 정전의 바로 뒤에는 언덕이 자리 잡고 있어서 남북 일직선에 건물을 배치하기 위해서는 산을 깎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그 대신에 건물을 지형에 맞추어 배치한 결과이다. 진선문 안의 행각은 들어가는 쪽은 폭이 넓고 반대쪽 나가는 쪽은 폭을 좁혀서 행각이 직사각형이 아니고 사다리꼴을 이루고 있다. 행각이 직사각형을 이루지 않는 예는 창경궁의 명정전(明政殿) 주변이나 경희궁 숭정전(崇政殿) 행각에서도 볼 수 있다. 직사각형 행각이 경직되고 정적인 느낌을 줄 것을 우려하여 의도적으로 사람들의 움직임에 따라 행각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미묘한 운동감을 주려고 한 것으로 풀이된다.

후원 역시 자연 지세에 맞추어 정자나 연지, 누각 등을 불규칙하게 조성해 놓았다. 창덕궁은 전체적으로 동일한 형태의 건물을 반복하지 않고, 언덕이 많은 지형 조건을 최대한 살리면서 그 지형 안에 건물이 적절히 자리 잡도록 세심하게 고려하여 전체 궁궐 공간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형태상 특징을 가진다.

[관련사건 및 일화]
창덕궁의 후원은 넓었지만 정전이나 침전 구역은 언덕으로 둘러싸여 비좁았다. 특히 정문인 돈화문(敦化門) 앞은 넓은 공간이 없었다. 그 때문에 경복궁의 광화문(光化門) 앞에서 치르던 행사들이 규모가 축소되거나 폐지되는 일이 있었다. 예를 들어, 중국 사신이 도성에 오면 궁궐 정문 앞에서 산대를 설치하고 나희(儺戱) 등 유희를 펼치는 것이 관례였다. 산대는 큰 것은 길이가 20m가 넘었는데 돈화문 앞에는 이런 공간이 없었다. 1620년(광해군 12)에 사신이 왔을 때 경복궁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상태였기 때문에 창덕궁에서 사신을 맞게 되었는데 결국 왕은 산대를 설치하지 말도록 했고 이후로 궁궐 문 앞의 산대는 사라지게 되었다. 비슷한 사례는 궁궐 문 앞에서 하던 무과 시험에서도 볼 수 있다. 무과 시험은 말을 부리는 능력이나 활쏘기 등이 있으며 조선전기에는 광화문 앞의 육조 대로에서 시험을 치렀다. 그러나 돈화문 앞은 장소가 비좁아 응시자들이 충분히 말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결국 대궐 문 앞의 무과 시험은 사라지고 대신 모화관(慕華館) 등 다른 곳에서 치러졌다.

신문고는 조선초기 경복궁에 설치한 적이 있지만 오랫동안 폐지되었다가 1771년(영조 47)에 창덕궁 진선문 앞에 다시 설치했다[『영조실록』 47년 11월 23일]. 신문고가 다시 등장하자 억울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시골에서 올라와 북을 울렸는데, 그 수가 너무 많고 대개는 사소한 개인적 일을 하소연하는 경우가 많아서 오히려 번잡스러워졌다. 그 때문에 북을 치는 사람을 제한하거나 함부로 북을 치면 벌을 내리기도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창덕궁의 신문고를 울린 기사가 영조에서 정조 때까지 빈번하게 나오다가 이후에는 잘 나오지 않고 1827년에 마지막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 『궁궐지(宮闕志)』
■ 『인정전영건도감의궤(仁政殿營建都監儀軌)』
■ 『창덕궁수리도감의궤(昌德宮修理都監儀軌)』
■ 『창덕궁영건도감의궤(德宮營建都監儀軌)』
■ 『창덕궁창경궁수리도감의궤(昌德宮昌慶宮修理都監儀軌)』
■ 김동욱, 「조선 정조조의 창덕궁 건물구성의 변화」, 『대한건축학회논문집』97, 1996.
■ 문화재청 창덕궁관리소, 『동궐도 읽기』, 창덕궁관리소, 2005.
■ 장순용, 『창덕궁』, 대원사, 1999.
■ 최종덕, 『(조선의 참 궁궐) 창덕궁』, 눌와, 2006.

■ [집필자] 김동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