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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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進士)

서지사항
항목명진사(進士)
용어구분전문주석
하위어성균진사(成均進士), 신방진사(新榜進士)
관련어감시(監試), 사마시(司馬試), 생원(生員), 생원시(生員試), 소과(小科), 진사시(進士試)
분야사회
유형직역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 과거 시험의 하나인 진사시 합격자에게 주어진 칭호.

[개설]
조선시대에 진사시(進士試)를 통해 배출된 진사(進士)는 23,776명으로 추산된다. 진사에게는 성균관에 입학하여 수학한 후 문과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지만 대부분은 진사로 존재하였다. 진사가 된다는 것은 본인은 물론 가문에도 영예로운 일이어서 진사 칭호만으로도 향촌 사회에서 지위를 누리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천거를 통해서 관직에 나갈 수도 있었다.

[담당 직무]
진사시의 목적은 초학자를 권면하기 위한 것이었다. 합격자는 성균관에 입학하여 원점(圓點) 300점을 얻은 후에 문과에 응시할 자격을 얻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원점 제도가 잘 지켜지지 않았다. 진사 중에 성균관에서 수학한 후 문과에 응시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응시해도 합격하기가 쉽지 않았다. 대부분의 진사는 진사 칭호 획득 자체를 영예롭게 생각했고, 향촌 사회에서 향교나 서원 또는 향회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며 양반으로서의 지위를 누렸다.

진사 신분으로도 천거를 받으면 관직에 나갈 수 있었는데, 주로 교수직이나 제향(祭享)과 관련된 직을 제수 받았다. 지방의 교수 인력을 문과 출신으로 모두 충당할 수 없는 경우에 목(牧) 이상은 문신으로 임명하고 도호부에는 생원·진사 중에서 쓸 만한 사람을 골라 임명하였다[『성종실록』 6년 1월 8일].

종묘(宗廟)·사직(社稷)·문소전(文昭殿)·연은전(延恩殿)·영경전(永慶殿)의 제향을 맡은 관원에 문신으로 모두 임명할 수 없는 경우, 사직령(社稷令)과 종묘령(宗廟令)은 진사 중에 학식이 있는 자를 가려서 임명하도록 하였다[『중종실록』 11년 7월 25일]. 지방 주군(州郡)의 문묘석전(文廟釋奠)에서 헌관(獻官)과 집사(執事)는 그 고을에 사는 생원·진사가 하도록 하였으며[『성종실록』 15년 11월 26일], 함경도의 육릉(六陵) 참봉은 함경도의 생원·진사로 제수하게 하였다[『숙종실록』 27년 3월 22일].

그 밖에 진사가 초입사직(初入仕職)으로 임용되었던 관직으로는 내시교관, 의금도사, 동몽교관 등이 있었다. 진사가 음관으로 처음 벼슬살이를 시작할 수 있는 나이는 30세로 한하였다[『인조실록』 12년 10월 2일].

18세기 후반 이후, 나이 들어 진사가 된 사람을 예우하는 사례가 자주 보인다. 영조는 진사로 합격한 사람 중 70세인 사람을 초사(初仕)에 임명하도록 하였다[『영조실록』 47년 2월 17일]. 정조는 70세가 된 사람은 첨추(僉樞)에, 80세가 된 사람은 오위장(五衛將)에 추천하였다[『정조실록』 14년 9월 12일]. 고종대에도 85세 이상 되는 사람에게 특별히 오위장(五衛將)을 가설하여 단일 후보로 추천하게 하였다[『고종실록』 11년 5월 23일 2번째사].

진사는 유교 지식인으로서 상소를 통해 여론을 조성하고 양반들이 지향하는 정치적 목적을 이루는 데 동참하였다. 주자학의 정착 과정에서 불교적인 요소를 제거하는 데에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소격서 혁파를 청하였고[『중종실록』 25년 5월 15일], 사찰을 철폐하고 승려의 호패(號牌)를 빼앗도록 요청하는가 하면[『중종실록』 33년 9월 26일], 승려 보우(普雨)의 죄를 청하는 상소를 통해 유교의 정착에 힘을 기울였다[『명종실록』 20년 4월 25일].

문묘 종사를 요청하여 유교적 이상의 실현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하였다. 이언적을 문묘에 배향하자고 상소하였고[『선조실록』 37년 9월 9일],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묘 종사를 주청하였으며[『인조실록』 14년 10월 19일], 송시열·송준길의 문묘 종사를 청하였다[『영조실록』 12년 8월 20일]. 정치적인 행동도 표출하여 조광조(趙光祖)의 신원을 청하는 상소문을 올리고[『인종실록』 1년 3월 13일], 서궁(西宮: 인목대비 김씨)의 폐출을 주장하였다[『광해군일기』 10년 1월 22일].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의병을 모집하여 나라를 지키는 데 일조하였다[『인조실록』 5년 2월 17일]. 1884년(고종 21) 예안(禮安)의 진사 이중찬(李中瓚)은 일본과의 수호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시대 변화에 따른 역할을 수행하였다[『고종실록』 21년 11월 26일].

진사는 양반 지식인이자 향촌 사회의 지도자로서 지방 행정에 관여하여 수령과 향리들과 갈등 또는 협조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향촌 사회에서 생원과 더불어 별도로 사마소(司馬所)를 조직하여 사마소를 하나의 관부(官府)처럼 만들고, 마을에서 제일 어른 노릇을 하면서 논의를 주장하며, 수령을 헐뜯거나 칭찬하는 여론도 조성하는 등 여러 폐단을 낳기도 했다[『명종실록』 15년 2월 7일].

[변천]
1392년 태조는 즉위교서에서 고려말 사장(詞章)을 중시하던 폐단을 없애기 위해 감시(監試)를 혁파하였다. 감시는 조선시대의 진사시에 해당한다. 이후 진사시는 시행과 폐지를 거듭하였다. 1393년(태조 2)에는 시행되었다 1395년에 폐지되었다. 1438년(세종 20)에 복구되었다가 1444년에 다시 혁파되었다. 진사시가 온전히 실시되기 시작한 것은 1453년(단종 1)이다. 치폐가 거듭된 것은 왕조 건립 초기에 사장과 경학(經學)을 둘러싼 정책 대립에 기인한다.

진사시의 시험 절차나 방방(放榜) 의식, 원점 방식은 모두 생원시와 같았으나 성균관에서의 좌차는 생원 아래에 앉게 하였다. 그러나 장유에 상관없이 앉게 되자 서로 다투고 업신여기게 되어 생원·진사를 가리지 않고 나이에 따라 앉게 하였다[『세종실록』 21년 1월 11일].

관직자의 진사 취득을 제한하여 통덕랑 이하만 응시하도록 한 것이나 서얼 자손의 허통 과정과 같은 응시 자격 변화는 생원시와 같다. 1708년(숙종 34)부터 서얼이면서 유학을 공부하는 사람을 칭하는 업유(業儒)는 당대에만 적용하고 아들 대부터는 유학을 칭할 수 있게 되어 서얼 자손도 진사가 될 수 있었다.

생원과 진사의 지위는 법적으로 차이가 없었으나 사회적 관념에서는 차이가 있었다. 조선초에는 사장보다 경학을 중시하여 생원을 우대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사장을 중시하는 학문 풍조로 인해 진사를 더 선호하고 존경하였다. 19세기 후반 고종 연간에 이르면 진사를 선호하는 경향이 합격 인원에 반영되었는데 생원시보다 진사시에서 훨씬 많은 인원을 뽑았다. 1891년(고종 28)에 생원 238명, 진사 559명을 뽑았고, 심지어 진사시가 폐지되던 1894년에는 생원 278명, 진사 1,055명을 뽑았다. 그러다 보니 생원시에 합격한 사람이 진사를 칭하는 경우도 있었다. 인사 자료인 『정사책(政事冊)』에는 1735년(영조 11)부터 생원도 진사로 표기한 경우가 보인다. 진사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가 반영된 현상이라고 본다. 정원을 초과한 경우에는 노인, 종친, 은사(恩賜)의 명목으로 뽑은 경우가 많았다.

후기로 갈수록 진사 칭호 자체를 획득할 목적으로 진사시를 준비하는 경우가 많아졌고, 진사를 획득하는 연령도 높아졌다. 평균 합격 연령은 15세기에 21세, 16세기에 26세, 17세기에 31세, 18세기에 34세, 19세기에 37세로 후대로 갈수록 늦어졌다. 합격 연령이 높아졌다는 것은 그만큼 진사가 되기가 어려웠음을 말한다.

시대에 따른 변화 양상 중에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진사의 출신 지역과 합격 인원이다. 진사는 서울에서 가장 많이 배출되었는데, 전체 진사의 42%가 서울 거주자였다. 진사 합격자는 지방의 경우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경기도에 집중되어 있고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에서는 아주 미약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부터 서울 출신의 비율이 줄어들면서 지방이 강세를 보이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평안도는 18세기 전반부터 약진세를 보이는데 특히 19세기에는 평양에서 많은 합격자가 나왔다. 평양에서는 19세기에 안동과 비교될 만큼 많은 합격자가 나왔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서울 거주자가 16%에 그칠 정도로 줄어들고 지방에서 많이 나오게 되었다.

진사시의 공식적 합격 인원인 100명은 조선시대 전 시기를 통해 잘 지켜졌으나 1858년(철종 9)부터 지켜지지 않게 되었다. 고종대에 가면 더욱 심해져 1891년(고종 28)에는 559명, 1894년에는 1,055명의 진사를 뽑았다. 생원도 증가하였지만 진사가 더욱 증가한 것은 당시 사족들이 진사를 더 영예롭게 생각하며 선호한 것에 국가가 부응하였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최진옥, 『조선시대 생원 진사 연구』, 집문당, 1998.
■ 송준호, 「이조 생원진사시의 연구」, 대한민국국회도서관, 1970.

■ [집필자] 최진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