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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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리공신(佐理功臣)

서지사항
항목명좌리공신(佐理功臣)
용어구분용어용례
상위어공신(功臣)
하위어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 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 순성명량좌리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 순성좌리공신(純誠佐理功臣)
관련어월산대군(月山大君), 정희왕대비(貞熹王大妃)
분야정치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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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예종 승하 후, 성종의 즉위를 도운 공로로 성종대에 책봉된 공신.

[내용]
1469년 11월 28일에 예종이 승하하였을 때, 원자는 5살밖에 되지 않았다. 원자 이외에 후계 왕으로 거론될 수 있는 사람이 2명 더 있었다. 예종의 형으로서 세자로 있다가 요절한 의경세자의 두 아들인 월산군과 자산군이 그들이었다. 후계 서열로 본다면 1순위는 원자였지만 나이가 너무 어렸다. 형인 월산군의 서열이 자산군보다 앞섰다. 그런데 정희왕대비는 자산군을 후계 왕으로 지명하였다. 11월 28일에 입궁한 자산군은 그날 즉위하였는데 곧 성종이었다.

성종은 예종의 삼년상이 끝난 직후인 1471년(성종 2) 3월 2일 자신의 즉위에 직접적인 공헌을 한 사람들을 좌리공신에 책봉하였다. 명분은 자신을 보좌하여 인심이 안정되고 국가가 태평해졌다는 것이었다. 좌리공신에는 총 73명이 녹훈되었다. 1등은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이라 하였는데 신숙주·한명회·홍윤성 등 9명이었다. 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이라 불린 2등은 정인지·정창손·한백륜 등 11명이었으며, 순성명량좌리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이라 불린 3등은 성봉조·노사신·강희맹 등 18명이었고, 순성좌리공신(純誠佐理功臣)이라 불린 4등은 김수온·이석형·윤필상 등 35명이었다.

좌리공신은 사실상 특별한 공로도 없이 공신에 책봉되었다. 뿌리를 따진다면 세조공신이라는 공통점이 있을 뿐이었다. 이들이 세조대·예종대·성종대의 정국을 주도한 이른바 훈척 세력의 핵심이었다.

[용례]
賜佐理功臣號 一等曰 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 二等曰 純誠明亮經濟佐理 三等曰 純誠明亮佐理 四等曰 純誠佐理[『성종실록』 2년 3월 28일]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국조공신록(國朝功臣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신명호, 『조선의 공신들』, 가람기획, 2003.

■ [집필자] 신명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