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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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친위(族親衛)

서지사항
항목명족친위(族親衛)
용어구분전문주석
관련어종친(宗親), 인척(姻戚), 오위(五衛), 갑사(甲士), 호분위(虎賁衛), 충순위(忠順衛), 충좌위(忠佐衛), 충의위(忠義衛), 총통위(銃筒衛), 충무위(忠武衛), 충찬위(忠贊衛), 의흥위(義興衛), 별시위(別侍衛), 친군위(親軍衛), 용양위(龍驤衛), 파적위(破敵衛), 정병(正兵), 장용대(壯勇隊), 팽배(彭排), 돈녕부(敦寧府), 종친부(宗親府)
분야정치
유형집단 기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왕실의 종친(宗親)과 인척(姻戚)을 우대하기 위해 오위(五衛)의 하나인 호분위(虎賁衛)에 소속시켜 편성한 군사.

[개설]
조선전기 중앙군사조직의 중추인 오위의 우위(右衛)인 호분위에 소속된 병종(兵種)이다. 호분위에는 족친위 이외에 친군위(親軍衛)팽배(彭排)가 있었다. 족친위는 국왕과 왕비의 친척으로 구성되었다. 국왕의 경우는 종성(宗姓) 단문(袒免) 이상 친척으로 9촌과 10촌 이내, 이성(異姓)의 시마(緦麻) 이상 친척으로 외4촌 이내가 해당되었다. 왕비는 시마복(緦麻服) 이상의 친척인 8촌 이내와 외4촌 이내였다. 세자빈은 기년(朞年) 이상의 친척으로 3촌 이내가 포함되었다. 국왕과 왕비의 친척들은 종친부(宗親府)돈녕부(敦寧府)의 관리하에 시험을 보지 않고 족친위에 소속되어 일정한 기간을 근무하면 관계(官階)를 받았으며, 족친위는 일정한 정원이 없으며 종 5품의 체아직(遞兒職)을 받았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족친위는 조선 개국 이후 왕실의 친인척에게 군역 면제와 더불어 사회적으로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명예직을 수여하는 차원에서 설립되었다. 당시 왕실의 친인척은 국왕과 왕비에 따라 달리 관리되었다. 국왕의 친척들은 종친부에 소속되었으며, 왕비의 친척들은 돈녕부에서 관리하였다. 따라서 족친위의 선발과 관리도 종친부와 돈녕부에서 일정 부분 관여할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성종대 돈녕부에서는 왕비의 일가 촌수를 보단자(保單子)족도(族圖)만을 상고하여, 병조(兵曹)이문(移文)하고 족친위(族親衛)에 허속(許屬)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세대(世代)가 많이 멀어진 친척들이 모람(冒濫)할 폐단도 있었다. 이에 족친(族親)으로 직위가 높고 명망이 있는 자를 가려서 일가의 촌수를 마감(磨勘)하여 돈녕부에 3년마다 한 차례씩 성적(成籍)하도록 하였다[『성종실록』 2년 12월 3일].

족친위가 왕실 친인척의 지위를 보장하는 측면에서 운영됨에 따라 자손들의 신분도 조정되었다. 조선은 노비제가 엄격하여 부모 중 누구라도 노비이면 그 후손도 천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데 왕실 자손의 경우는 차이가 있었으며, 그중 족친위의 후손도 해당되었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족친위로서 노비인 첩 사이에 자식을 낳게 되면 노비제의 원칙과 달리 이들은 노비 신분에서 해방되었다. 이에 따라 정부 차원에서 족친위에 가담하여 신분을 상승하려는 폐단을 방지하기 위해 왕실의 후손이라도 노비의 자손이면 해당하지 않게 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왕실에서는 정부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종량(從良)을 허가하도록 하였다[『중종실록』 7년 11월 18일]. 족친위가 군역을 면제함과 동시에 양인 신분을 보장해주는 혜택이 있는 것에 따라 많은 왕실의 친인척이 그 권리를 주장하였다. 대부분의 왕실손은 종친부와 돈녕부에서 처리하였다. 그런데 왕비의 친인척이 매번 국혼의 향방에 따라 증가함에도 그들의 범주를 정확히 재단하지 못해 궁궐에 난입하여 상언하는 일까지 발생하였다. 예컨대 세조대에는 학생(學生) 최의로(崔義露)가 신부(信符)를 빌려 차고 영추문(迎秋門)에 들어와 보루문(報漏門)의 북을 함부로 치면서 중궁(中宮)의 이성친(異姓親)으로 아직 족친위에 소속되지 못하고 있는 것을 하소연할 정도였다[『세조실록』 14년 5월 3일].

[조직 및 담당 직무]
조선전기 도성에서 시위(侍衛)하는 제색군사(諸色軍士)는 모두 오위(五衛)에 분속(分屬)시켰는데, 족친위는 친군위·팽배와 함께 우위인 호분위에 소속시켰다[『예종실록』 1년 5월 7일]. 조선전기 족친위에 소속된 군사는 다른 병종과는 달리 정원이 없으며 장번(長番)으로 하였다[『성종실록』 1년 2월 30일]. 족친위에 소속되는 인원의 액수가 정해져 있지 않고 근무기간도 연한수가 없는 장번이라는 점은 족친위가 왕실 친인척의 지위를 보장하기 위해 설치한 명예직이었음을 증빙해준다. 물론 족친위에 소속된 자들이 군무를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족친위 소속으로 나이가 젊고 글을 알아서 학습할 수 있는 자들은 한 통(統)의 장수로 삼아서 경서(經書)와 『무경』, 『병요』, 『장감박의』 등을 가르치게 하였다[『성종실록』 5년 7월 20일].

[변천]
족친위의 구성은 임진왜란과 두 차례의 호란으로 혼란에 빠졌다. 종친부와 돈녕부에서 관리하던 왕실 인척의 명부가 일부 빠지고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인조대에는 왕후의 족보를 잃어버려서 돈녕부에서 치부(置簿)하여 이조로 이문할 적에는 단지 각 사람이 말한 바에만 의거하는 문제가 있었다. 이에 족친위는 대수(代數)를 감축시키려는 계책을 내놓을 정도였다. 결국 경외에 이문하여 돈녕단자(敦寧單子)를 일일이 수납하게 하는 처방책을 내놓았지만 조선후기로 갈수록 족친위와 같이 군역을 면제받는 특수직에 허위 등록하는 폐단이 발생하게 되는 단초를 제공하였다[『인조실록』 26년 7월 8일]. 결국 영조대에 대수를 한정하여 정역(定役)시키야 한다는 의견까지 나오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국왕의 자손은 5대로 한정하여 족친위에 소속되도록 했다[『영조실록』 5년 5월 5일]. 그렇지만 개국 초기 공신이면서 왕실손이었던 사람에 대해서는 그 혜택을 막기 어려웠다. 예컨대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의 11대손이 새로운 족친위 규정에 의해 군역을 지게 되자 개국 공신인 왕실의 지친으로서 단종을 섬기다가 목숨을 바친 집안임에도 충군(充軍)할 수 있는가라는 상언에 따라 새로운 시책의 시행이 미봉에 그치기도 했다[『정조실록』 15년 2월 26일].

[의의]
족친위는 왕실 후손의 군역을 면제하고 사회적 지위를 보장하는 방편으로 시행된 제도로 왕실사 연구와 조선시대 왕실 세력의 분포를 연구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집필자] 이왕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