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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국가에서 종이를 생산하기 위해 설치한 관서 혹은 관영(官營) 지소(紙所).
[개설]
조지서 설치의 직접적인 계기는 조선시대의 지폐인 저화(楮貨)에 필요한 종이를 생산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필요에 따라 1415년(태종 15) 처음 경기에 관영 지소를 설치하였다. 이때 명칭은 조지소(造紙所)였으며 1466년(세조 12) 관제 개편에 의해서 조지서(造紙署)로 개칭되었다.
조지서는 설치 후 저화용 종이를 생산하는 일보다 표전(表箋)·자문(咨文) 등 외교 문서를 비롯하여 왕실과 중앙 관사에서 필요한 국가 수요의 종이를 생산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조지소는 설치 후 공납에 의존해 왔던 국가의 종이 수요를 상당 부분 대신할 정도로 양질의 종이를 다량 생산하는 관영 지소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조지소는 16세기 이후 원료의 수급과 담당 관리인 지장(紙匠)의 급료 부족 그리고 관리의 폐단이 나타나면서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조지서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건물이 파괴되고, 국가 재정이 어려워지면서 시설과 장비가 복구되지 못하였다. 또한 지장을 확보하지 못하는 등 상당 기간 관영 지소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지 못하였다. 특히 18세기 중엽 이후 전국에 시장이 개설되고 민간 수공업이 활기를 띠면서 조지서를 비롯한 관아 소속의 외공장(外工匠)의 생산 활동도 침체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조지서가 완전히 생산을 중단한 것은 아니었으며 1882년(고종 19) 폐쇄될 때까지 그 명맥은 유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 태종은 중앙 집권화 과정에서 발생되는 재정 지출을 효과적으로 보완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에서 저화제를 실시하려고 하였다. 태종은 즉위한 후 그해 4월 사섬서를 설치하고 이곳에서 저화의 발행과 통용을 관장케 하였다. 처음 조지소를 설치하고 사섬(司贍) 1명에게 종이의 두껍고 얇은 것을 고르도록 감독하게 한 것에서 보듯이, 조지소 설치의 직접적인 계기는 저화를 만드는 종이를 생산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저화 만드는 종이를 각 도에서 나누어 만들다 보니 두께가 달라 같은 두께의 종이로 가려내야 했다. 이러한 폐단을 줄이기 위해 1415년 경기에 따로 조지소를 설치한 것이었다.
조지소는 이러한 설치 동기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실제 저화용 종이를 만드는 일보다 오히려 명나라 외교 문서용 종이를 만드는 일에 주력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본래 명나라 사대외교 문서의 표(表)·전(箋)·주(奏)·계(啓)·자문(咨文)에 쓸 종이는 전라도 전주와 남원부에서 해마다 세밑에 바쳤다. 그러나 생산량이 충분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1420년(세종 2)에 왕의 특명으로 조지소를 두어 종이를 만들었는데 품질이 옛것에 견주어 훨씬 곱고 좋았다. 이후로 전주와 남원에 하던 세공 독촉의 폐단이 비로소 없어졌다.
조지소 신설과 관련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조지서는 세종조에 창설했으며, 표전·자문지 및 여러 가지 종이를 만드는 일을 맡았다”고 하였다. 또한 『중종실록』에는 “조지서는 본디 사대(事大)하는 문서 때문에 설치한 것인데” 하여 조지서가 저화용 종이를 만들기 위해 설치하였다는 앞의 지적과 달리 해석될 소지가 있다.
조지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국가에서 필요하거나 궁실과 각 관사에서 사용하는 종이를 주로 생산하였다. 종이의 품질도 개선되었고 지방 공물의 의존도를 크게 낮출 정도로 조지소의 생산 활동은 실효를 거두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조지소는 장의사동에 있다고 하였다. 장의사동은 오늘날 종로구 신영동 세검정초등학교 부근으로 장의사(壯義寺 혹은 藏義寺)라는 사찰에서 지명이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조직 및 역할]
조지서의 조직은 운영과 관리를 맡는 관원과 종이를 직접 생산하는 지장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조지소에 소속되지는 않았지만 공역(工役)과 군역에 동원된 역부(役夫)도 구성되어 있다.
조지소는 1466년(세조 12) 대대적인 관제 개편이 이루어질 때 조지서로 개칭되었다. 조지소가 조지서로 명칭을 바꾼 것은 임시 기구에서 정상적인 중앙 관제로의 편입을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조지소는 이미 호조에 소속되어 운영·유지되고 있었으며, 종이를 생산하는 지장의 수도 1460년에 74명이나 되었다.
조지서가 공조에 소속된 것은 1466년이다. 『경국대전』「공전(工典)」에 조지서는 공조의 속아문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1466년은 『경국대전』의 「이전(吏典)」·「예전(禮典)」·「병전(兵典)」·「공전」이 완성되는 해이며, 조지소가 조지서로 관제 개편이 이루어지던 해이다. 따라서 조지소로 있을 당시에는 호조에서 운영하다가 관제 개편이 이루어지면서 공조로 편입된 것이다. 조지서는 이후 1882년 폐지될 때까지 공조 소속으로 있었다.
조지서의 활동이 세종 연간에 가장 활발하였던 것은 세종의 서적 간행 정책에 기인한다. 1431년(세종 13) 1월 조지소 관리들의 책임과 사무의 과중함을 들어 제거(提擧) 1명을 증원하고 제조(提調) 1명을 두어 관원의 교대가 있을 때마다 그 해유(解由)를 전담케 하였다. 또 같은 해 4월 별좌(別坐: 한자 추가) 한 사람과 주자소의 서원(書員)인 예차(預差) 4명을 증원한 일이 있는데 이는 모두 조지소 업무가 복잡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조지소의 활동은 세종 연간을 지나면서 점차 약화된 것으로 보인다. 관리들의 근무 태만이 지적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생산된 종이의 품질도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 바로 그 같은 이유이다.
조지소로 있을 당시 최고위직은 제조이고 그 아래 제거 1명을 두었다. 그리고 이하 별좌 4명과 사지(司紙) 1명을 각각 두었다. 조지서를 비롯한 몇몇 경공장(京工匠)에는 최고 우두머리에 해당하는 도제조(都提調)를 두고 있었다. 이들 도제조는 본래 경공장의 직제에 포함되어 있지는 않았으나 전직 관료의 예우 차원에서 경공장에 도제조를 임명하였다.
조지서의 관원 가운데 불필요한 수를 줄이자는 건의가 있었다. 이는 조지서가 본래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 까닭도 있지만 국가 재원의 낭비를 줄이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이에 따라 1506년에는 사지를 혁파하고 녹봉을 받지 않는 무록관(無祿官)을 각각 1명씩 더 두자는 논의가 있었다.
조지서의 관원은 도제조 1명, 제조 2명, 별좌 8명, 별제(別提) 4명, 사지 1명 등 모두 16명으로 파악된다. 이는 조지서를 관리·운영하는 관원이고 이 관원의 밑에는 체아직(遞兒職)과 지장이 있었다. 체아직은 종이를 직접 생산하는 지장의 우두머리 격에 해당하며 그 아래에는 지장을 두었다.
조지서는 경공장 가운데 단일 직종으로는 장인이 많은 관사에 속한다. 조지소로 있을 당시에는 지장이 74명이었고, 조지서로 개편된 이후에는 지장이 81명, 목장(木匠) 2명, 염장(簾匠) 8명이 있었다.
조지서 지장 74명(1460년)과 81명(1466년)은 종이를 만드는 장인만을 지칭한다. 지장 외에 힘든 노동력이 필요한 단순 노동에는 도역의 죄를 범한 자들을 조지서에 도침군으로 배속시켜 죄과에 해당되는 기간 동안 노동으로 대신하도록 하였으며 지방의 선상노(選上奴)도 조지서 인력으로 활용하였다. 이 외에도 도형(徒刑)의 죄목으로 복역하는 사람인 도역자(徒役者)나 도년자(徒年者)같이 죄를 범한 자들을 조지서에 도침군으로 배속시켜 죄과에 해당되는 기간 동안 노동으로 대신하도록 하였다.
도침군과 같은 노동력 활용 외에도 서울의 각 사에서는 서울과 지방에서 선발된 선상노로 인력을 충당하여 썼다. 선상노는 경기도에 거주하는 경거노(京居奴)이거나 지방 관사에 소속된 관노 가운데서 선발된 자들이다. 조지서의 경우 차비노가 90명, 근수노가 5명이 정원으로 정해져 있었다. 이 외에 승려가 조지서에 역(役)으로 종사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조지서는 정규 인력과 보충 인력의 업무가 구분되어 있고, 또 노동력을 제대로 확보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까지 마련된 규모가 큰 경공장이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하면, 조지소로 있을 당시의 인적 구성은 제조 1명, 제거 1명, 별좌 4명, 사지 1명이었고 급사(給事), 부급사(副給事), 지장을 포함하여 총 74명이었으며, 조지서로 개칭된 이후에는 도제조 1명, 제조 2명, 별좌 8명, 사지 1명, 별제 4명, 공조(工造) 4명, 공작(工作) 2명, 지장 81명, 목장 2명, 염장 8명, 선상노 95명이었고 수가 정해지지 않은 도침군이 있었다.
[변천]
조지서는 15세기 후반 이후 공납의 폐단으로 인해 닥나무 공급이 원활하지 못하고 지장에 대한 처우가 열악해지면서 생산력이 떨어졌다. 관장제 수공업 체계가 연산군대와 중종대를 거치면서 붕괴되어 갔다는 지적은 조지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조지서의 기능이 완전히 상실된 것은 아니었으며 이때에도 국가에서 필요한 양질의 종이를 생산했다.
조지서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생산 시설이 크게 파괴되었다. 국가 재정이 어려워 지장에게 줄 급료가 부족하였고, 임진왜란 이후 30여 년이 지나도록 솜씨 있는 지장을 확보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조지서는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하였다. 또한 인원이 제대로 확보되지 못해 지장들은 과중한 노동에 시달렸고 역을 회피하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조선후기에는 국가 재정의 어려움과 양역 인구의 감소라는 두 과제를 안고 있었다. 조지서 역시 양인 장정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로 조지서 지장의 수를 99명으로 확대 규정한 적이 있다. 조지서는 지방의 승려들을 정기적으로 올려 보내도록 하여 노동 인력으로 활용하였는데 이는 부족한 양인 장정의 수를 확보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1764년(영조 40)에는 조지서 혁파에 관한 의견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며, 1765년에는 재력이 넉넉한 관사로 옮기는 방안도 논의되었다. 조지서 지장들은 빈번한 입역(入役)과 과중한 노역을 견디지 못해 역을 회피하는 등 조지서의 잔폐(殘廢)가 반복되고 있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진휼청과 병조에서는 한시적으로 지장들의 급료를 지급해 주어 조지서의 생산 활동을 독려하려 하였다.
조선후기 조지서는 시설 복구의 미비, 지장에게 부여되는 과도한 노동력, 급료의 지급 부족으로 인한 역(役)의 회피, 조지서 운영 재원의 부족, 원료 공급이 제때에 이루어지지 않는 문제 등으로 생산 활동이 원활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조지서가 완전히 생산 활동을 중단한 것은 아니었으며 1882년 폐쇄될 때까지 유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