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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궁궐의 정전(正殿)이나 지방의 객사 등에 보관된 ‘전(殿)’ 자를 새긴 패.
[개설]
전패(殿牌)는 ‘전’ 자를 새긴 위패(位牌)로, 궁궐의 정전에 모신 전패는 중국 황제를, 지방 객사에 보관된 것은 조선의 왕을 상징하였다. 1월 1일을 비롯해 동지나 각종 명절에 전패에 절하는 망궐례(望闕禮)를 행함으로써 하례(賀禮)를 표시하였다. 유사한 것으로는 ‘궐(闕)’ 자가 새겨진 궐패(闕牌)가 있는데, 궐패와 전패 모두 왕을 상징하였다.
[연원 및 변천]
전패가 언제부터 운영되었는지 현재로써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고려사』에는 전패를 비롯해 궐패 등의 명칭이 확인되지 않고, 조선초의 『세종실록』 기록에서 비로소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이후 시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객사에 보관되었던 전패는 1896년(건양 1)에 명칭이 모두 궐패로 개칭되었다.
[형태]
‘전’ 자를 새긴 위패 모양으로, 지방의 경우에는 객사 주 건물의 대청에 모셔졌으며, 궁궐에서는 특정 행사에 앞서서 정전에 배치하였다. 정전에 설치된 전패는 의식이 끝나면 다시 철거하였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지방 수령은 1월 1일인 정조(正朝)와 동지, 그리고 왕의 탄신일에 객사에 모셔진 전패에 절하는 망궐례를 하면서 축하하였다. 또한 수령이 고을을 떠났다가 돌아올 때 반드시 전패에 문안례를 올렸고, 새로 임지에 부임할 때도 전패에 배례하는 것이 순서였다.
조선후기에는 전패가 파손된 변고가 여러 번 발생하였다. 1655년(효종 6)에는 전라도의 나주와 동복(同福)에서, 1660년(현종 1)에는 전라도 광양현에서, 다음 해에는 경상도 창원대도호부에서, 1661년에는 충청도 홍주목에서 전패가 파손되는 일이 있었다[『효종실록』 6년 1월 17일], [『현종실록』 1년 11월 13일], [『현종실록』 2년 윤7월 10일]. 또한 1662년 충청도 회덕, 경기도 연천 등지에서 전패가 도난당하는 일도 있었다[『현종실록』 3년 9월 23일], [『현종실록』 3년 12월 21일]. 전패가 분실되면 해당 고을은 읍격이 현으로 강격되거나 혁파되었다가 10년 후에 복구되었다[『현종실록』 4년 11월 3일]. 전패의 파손이나 도난은 지역민 중 일부가 국가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