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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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최(殿最)

서지사항
항목명전최(殿最)
용어구분전문주석
동의어고과(考課), 포폄(褒貶)
관련어고적(考績), 상공(上功), 수령칠사(守令七事), 하공(下功)
분야정치
유형법제 정책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 관리의 근무 실적에 대한 우열을 평가하거나, 혹은 점수를 매기는 기준.

[개설]
전최는 이조(吏曹)에서 관장하였다. 1392년(태조 1)에 수령의 전최법이 제정되어 이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관직의 업무 특성에 따라 참조 사항을 정하였다. 매년 두 차례의 고과(考課)수령칠사(守令七事)를 비롯하여 근무 일수, 업무 실적, 시험 성적 등을 참작하여 상·중·하의 성적을 매기도록 하였다. 이 전최 성적이 고과의 평가 기준이었으며, 이를 통하여 관리의 능력을 정확히 판단하여 출척(黜陟)을 공정하게 행할 수 있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전최는 관리의 근무 실적에 대하여 선(善)·최(最)·악(惡)·전(殿) 등 4등급으로 구분하여 성적을 매기는 기준이었다. 동시에 관리의 근무 평가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였다. 전최의 전은 하등, 최는 상등의 뜻이었다. 전최는 외관의 수령칠사에 대한 실적 평가에서 시작되었으며, 점차 경관(京官)으로 확대되어 경외(京外)의 모든 관리가 그 대상이었다. 수령칠사란 수령이 지방을 통치할 때 힘써야 할 7가지 사항으로서, 농상(農桑)을 성하게 하고, 호구(戶口)를 늘리며, 학교를 진흥시키고, 군정(軍政)을 닦으며, 역(役)의 부과를 균등하게 하고, 소송을 간명(簡明)하게 하며, 아전들의 교활하고 간사한 버릇을 그치게 하는 것을 말하였다.

[내용]
『경국대전주해(經國大典註解)』에 의하면, 전(殿)은 하공(下功), 최(最)는 상공(上功)의 뜻이었다. 곧 전은 관리의 공적이 하등이고 최는 상등이라는 뜻의 글자였다. 따라서 전최는 본래 경외의 모든 관리를 대상으로 그 실적을 고과하여 등급을 매기는 성적 기준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그런데 고과 평가를 나타내는 용어로도 널리 쓰이게 되었다.

전최는 외관(外官)을 대상으로 수령의 근면함과 태만함을 고찰한 데서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삼봉집(三峰集)』에 수록된 고과법에서의 평가 기준은 선·최·악·전 등 4등급이었다. 이 등급의 기준은 근무 태도와 수령칠사였다. 선과 악의 평정 기준이 근무 태도였으며, 전과 최가 수령칠사의 실적이었다. 그런데 전최가 고과의 성적 기준이 됨으로 인하여, 경관도 전최의 성적이 적용되었다.

전최를 매길 때의 기준은 수령칠사 외에, 근무 일수, 업무 실적, 관원의 시험 성적 등이 있었다. 그 시행 과정에서는 직사마다 특수하거나 주요한 업무에 대하여 참조 사항을 지정하여 제도화하기도 하였다. 수령의 전최에서 칠사 외의 참조 사항으로 지정된 내용을 살펴보면, 제사를 지내지 않거나 그릇을 더러운 것을 쓰고 제수(祭需)에 남은 음식을 쓰며 향교의 건물을 수리하지 않고 교관(敎官)을 대접하는 데 마음을 쓰지 않는 것이 있었다. 이러한 자는 관찰사가 이 사실을 조사하여 참작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향교의 교관은 교생을 교육시킨 성과를 주요 기준으로 삼았다. 교생이 매일 읽은 책의 분량은 매월 말에 수령이 관찰사에게 보고하고, 관찰사는 돌아다니면서 강(講)하는 시험을 보게 하여 학령(學令)에 의하여 권장하거나 징계하였는데, 이를 장부에 기록해 두었다가 교관을 전최할 때 참고로 삼도록 하였던 것이다. 동몽교관도 근면과 태만 정도를 비교하여 참고하였다.

이조(吏曹) 및 관찰사는 매년 말에 경외의 관리에게 『경국대전』을 추첨(抽籤)하여 강하는 시험을 보였다. 그 통(通)·불통(不通)을 기록해 두었다가 전최할 때 참작하였다. 사자(寫字)하는 자도 성적의 고하(高下)를 매겨 두었다. 부본(副本)·주본(奏本)·자문(咨文)·표(表)·전(箋)·방물장(方物狀) 중 20건을 서사(書寫)한 자는 고과에서 상(上) 하나를 받은 것으로 쳐 주고, 한어(漢語)·이문(吏文)·사자에 뛰어난 자는 비록 범죄를 저질러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더라도 중범(重犯)이나 사죄(私罪)를 제외하고는 그대로 계속 근무하게 하였다. 교서관(校書館) 관원은 매월 제조(提調)가 팔분(八分)·대전(大篆)·소전(小篆)·상방전(上方篆) 등의 글씨를 시험 보게 하여 성적의 차례를 정하여 장부에 기록하여 두었다가 전최할 때 참작하였다.

예조(禮曹)에서는 매월 말에 여러 의원(醫員)들이 병든 사람을 치료하는 데 근면함과 태만함을 조사하여 장부에 기록해 두었으며, 장악원의 관원은 음악 학습의 근면·태만으로 전최를 삼았다.

[변천]
『삼봉집』 「경제문감」 감사 조에는 1392년(태조 즉위년)에 교시한 고과법이 수록되었다. 이것이 태조 원년에 제정된 수령의 전최법과 관련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확실하지 않았다. 수령의 전최법에서는 대소(大小) 목민관(牧民官)들은 모두 30개월을 1고(考)로 삼고, 임기가 차면 그 수령의 욕심 많고 잔인 포학하며 무능 유약하고 게으르고 용렬하며 직무를 감내하지 못한 사람은 각 도의 감사(監司)가 그 실상을 조사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무능한 사람을 물리치고 유능한 사람을 등용하게 하였다[『태조실록』 1년 8월 2일]. 이 법에서는 정도전이 말한 평가 기준 중 선악에 주안을 두었지만, 농본 사회인 조선에서 수령의 치적은 농사의 권장을 가장 중시하였다. 그리하여 수령의 전최는 전지(田地)의 개간이 많고 적은 것을 3등으로 나누어, 이를 무능한 사람을 물리치고 유능한 사람을 등용시키는 데 참고하게 하였다[『태조실록』 3년 4월 11일].

수령의 전최는 1년에 두 번 고과하도록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직임에 적당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 때 그 폐단을 알고도 포폄할 기한을 기다리면 출척의 의의를 잃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러한 경우에는 기한에 구애받지 말고 실봉(實封)하여 계문하도록 하였다[『태종실록』 5년 2월 9일]. 또한 성적을 참고할 때에 각 도 감사는 전최를 갖추어 사헌부에도 이문(移文)하여, 천거한 것이 적당한 사람이 아니면 죄가 천거한 사람에게도 미치게 하였다[『태종실록』 12년 1월 26일].

따라서 수령의 전최는 각 도 감사의 권한이었다. 전최할 때의 점수 배정은 상·중·하였다. 1년에 두 차례에 걸쳐 이렇게 점수를 매겨 수령 치적의 우열을 정하며 이를 근거로 하여 포폄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각 도의 감사는 미리 수령의 전최를 마감하지 않다가 도목정(都目政)이 가까웠을 때를 당해서야 실적(實跡)도 기록하지 않고, 다만 상·중·하 3등만을 써서 계본(啓本)을 올리는 폐단이 있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하여 1416년(태종 16)에 포폄법을 제정하였는데 봄·여름 포폄은 6월 15일 이전에, 가을·겨울 포폄은 11월 15일 이전에 칠사의 실적을 기록하여 올리는 것으로 항식(恒式)을 삼았다[『태종실록』 16년 1월 12일].

이처럼 전최에서 수령에 관한 사항은 조선초부터 강조되어 왔지만, 경관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내용들은 그 후 『경국대전』에 자세히 규정되었으며, 이러한 전최법은 고과법과 더불어 조선말기까지 지속적으로 운영되어 나갔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경국대전주해(經國大典註解)』
■ 『대전회통(大典會通)』
■ 『삼봉집(三峰集)』

■ [집필자] 임민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