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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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서(典校署)

서지사항
항목명전교서(典校署)
용어구분전문주석
관련어교서감(校書監), 교서관(校書館)
분야정치
유형집단 기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에 서적의 인쇄·반포 및 향축과 인장의 전각을 담당하던 관서.

[개설]
1392년(태조 1) 조선 건국과 함께 고려말의 교서감(校書監)을 계승하여 문적(文籍)·도서(圖書)와 제사의 축소(祝疏) 등을 담당하는 관서로 설치한 것에서 기원한다. 건국 초의 교서감이 1401년(태종 1)에 교서관(校書館)으로 개칭되었다가 1466년(세조 12)에 다시 전교서로 개칭되었다[『세조실록』 12년 1월 15일]. 이 전교서가 1484년(성종 15) 『경국대전』이 완성되는 과정에서 다시 정3품 아문으로 승격되고 교서관으로 복구되면서 소멸되었다[『성종실록』 15년 1월 21일].

[설립 경위 및 목적]
세조는 1461년(세조 7)에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여 불경(佛經)의 편찬에 진력하였는데, 이에 따라 유교의 경적(經籍)을 편찬하는 일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하였다. 이 때문에 주로 유교 경적을 인쇄하여 반포하던 교서관의 기능이 축소되기도 하였지만, 1466년에 『경국대전』의 편찬과 관련된 관제정비에 수반되어 그 관아명이 전교서로 개칭되면서 성립되었다.

[조직 및 역할]
전교서의 전신인 태종 때의 교서관에는 종5품의 교리(校理) 1명, 종6품의 부교리(副校理) 1명, 정7품의 교서랑(校書郎) 2명, 정8품의 저작랑(著作郞) 2명, 정9품의 교감(校勘) 2명, 종9품의 정자(正字) 2명으로 구성되었다. 이후 정3~종6품관으로 제수되는 제거(提擧)·별좌(別坐) 2명과 종2품 이상이 겸하는 제조(提調) 3명이 새롭게 설치되고 부교리가 혁거되었다. 전교서가 성립될 때 다시 제조와 제거·별좌가 혁거되고 랑이 박사(博士), 저작랑이 저작(著作), 교감이 정자, 정자가 부정자(副正字)로 각각 개칭되면서, 종5품 교리 1명, 정7품 박사 2명, 정8품 저작 1명, 정9품 정자 2명, 종9품 부정자 2명이 구성원이 되었다. 부교리가 예조 판서, 참판, 참의의 지휘를 받으면서 박사 이하를 거느리고 유교 서적의 간행과 반포 등의 일을 담당하였다.

[변천]
1466년에 성립된 전교서는 1483년에 소속된 관리가 서적과 향축(香祝)의 일이 중대함을 언급하면서 종5품 아문을 정3품 아문으로 승격시키고, 관서의 명칭도 교서관으로 복구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것이 받아들여져 이듬해 전교서는 교서관으로 개칭되면서 소멸하였다. 이때의 교서관도 정3품의 겸직인 판교(判校) 1명이 설치되면서 정3품 아문으로 승격되었다가 『경국대전』에 다시 제조 2명과 5품과 6품으로 제수되는 별좌와 별제가 증치되면서 후대로 계승되었다. 1771년(정조 1) 정조의 정치개혁, 문교진흥과 관련되어 설치된 규장각(奎章閣)에 그 관직이 이속되고 규장각 속사인 외각(外閣)으로 전환되면서 소멸하였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최정환, 『역주 『고려사』 백관지』, 경인문화사, 2006.
■ 한충희, 『조선초기의 정치제도와 정치』, 계명대학교출판부, 2006.

■ [집필자] 이석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