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1463년(세조 9) 11월 홍문관을 설치할 당시 저작랑(著作郞)을 처음 두었다. 본래 1420년(세종 2)에는 집현전에 정8품의 저작(著作)을 두었다[『세종실록』 2년 3월 16일]. 1466년(세조 12) 7월 관제 개정 시 저작으로 개칭되었다. 승문원과 교서관에도 정8품직의 저작을 두었다. 홍문관, 승문원, 교서관에 총 5명이 있었고, 모두 문관으로 임명되었다.
[담당 직무]
1420년에는 집현전에 정8품의 저작을 녹관(祿官)으로 두었으며 경연관을 겸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2년 3월 16일]. 1445년에는 『의방유취』의 편찬 등 국책 사업에도 저작이 참여하였다[『세종실록』 27년 10월 27일]. 홍문관의 저작은 경연에 참석하였으며 국사 편찬의 임무도 담당했다. 저작은 홍문록 작성 시 홍문관의 박사·정자 등과 함께 문과 방목을 살펴서 뽑을 만한 사람을 베껴 내기도 하였는데, 이렇게 뽑은 명단에서 부제학·전한·응교·교리·수찬 등은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이름에 권점(圈點)하였다[『중종실록』 12년 11월 25일]
[변천]
저작랑은 1356년(고려 공민왕 5) 비서감(秘書監)에 종6품 2직이 설치된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 저작랑은 이후 고려말까지 2차에 걸쳐 폐지와 설치를 반복하면서 고려말까지 운영되었다. 조선왕조는 1392년(태조 1)에 개국과 함께 고려말의 관제를 계승하여 문적(文籍)·도서와 제초(祭醮)의 축소(祝疏) 등의 일을 관장하던 교서감(校書監)에 정8품 2직을 두었다. 이어 1411년(태종 11)에 문서응봉사(文書應奉司)가 개칭되면서 승격되어 이문(吏文)의 예습(預習)과 사대문서를 제술하던 승문원에 정8품직이던 부정자(副正字)가 저작랑으로 개칭되면서 승문원에도 저작랑이 두어졌다. 또 1463년에 장서각이 개편되면서 등장한 홍문관에 저작랑 1직이 설치되었다. 그러다가 1466년 『경국대전』 편찬과 관련된 대대적인 관제 정비 때 저작랑은 저작으로 개칭되면서 계승되었다. 저작은 이미 1420년에 집현전에 1직이 두어져 운영되기도 하였지만, 1478년(성종 9)에 홍문관이 정식 관아가 될 때 저작 1직이 다시 설치되면서 『경국대전』에 홍문관 1직, 승문원 2직, 교서관 2직으로 규정되었고, 1782년 이후 교서관이 규장각 외각으로 개칭되기도 했지만, 저작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까지 계승되었다.
세종은 홍문관의 전신인 집현전에 있던 저작에게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명하면서 사가독서를 통해 현실 정치에서 효과를 거두려고 하였다[『세종실록』 8년 12월 11일]. 저작랑을 통해서 문풍(文風)을 진작시키겠다는 세종의 의도를 살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