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왕과 왕비의 관은 가래나무[梓]로 만들기 때문에 흔히 재궁이라 불렀다. 재궁은 벽(椑)과 대관(大棺)의 이중으로 마련되었다. 벽은 시신의 몸을 넣는 관인데, 옻칠을 단단하게 하여 벽돌처럼 된 까닭으로 벽이라 한다. 이 벽이 들어가는 바깥쪽의 외관(外棺)을 대관이라 부른다. 재궁은 초종(初終) 후 3일째에 소렴(小殮)이 시행된 이후 5일째에 대렴(大斂)이 시행되기 이전에 만들어진다. 대렴이 시행된 후 시신은 재궁 속에 안치한다.
[내용 및 특징]
내관인 벽은 왕이 즉위하는 해에 소나무의 황장판(黃腸板)을 사용하여 만든다. 내관은 두께가 3촌(寸)이고 높이와 너비와 길이는 때에 따라 가늠해서 제작한다. 대관도 또한 소나무 황장판을 사용하여 만드는데, 두께는 4촌이고 그 높이와 너비와 길이는 벽의 크기에 따라 다르다. 대관과 벽의 사이는 1촌 5푼의 차이를 둔다. 이밖에 관의 뚜껑 및 가장자리와 연결시키는 데 사용하는 나무 조각인 나비장을 만든다. 나비장의 모양은 양쪽 머리는 넓고 중앙은 작은 형태로, 관과 뚜껑을 합하는 양쪽 가에 3개가 있고, 양쪽 끝에 각각 1개씩 있는데, 홈을 만들어 쓴다.
대렴이 이루어지면 공조(工曹)의 관속들이 벽의 안팎을 꾸민다. 벽의 안에는 붉은 비단[紅綾]을 사방에 붙이고, 녹색 비단[綠綾]을 네 귀퉁이에 붙인다. 그리고 익힌 수수[秫米]의 재[灰]를 밑바닥에 4치가량의 두께로 깐다. 칠성판(七星板)을 얹고 붉은 비단으로 만든 요와 자리를 그 위에 편다. 대관의 경우 역시 벽과 마찬지로 비단을 붙여서 꾸민다.
[변천]
조선왕조의 건국 이후 유교적 국상이 진행되었지만 재궁이 미리 제작되었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재궁 제작은 1422년(세종 4) 5월 9일 태종의 병이 심해지자 세종은 담당 관청에 재궁을 준비하라고 명한 데서 그 기록이 처음 나온다[『세종실록』 4년 5월 9일]. 여기서 언급된 재궁의 준비가 새로운 관의 제작을 뜻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1432년(세종 14) 정척(鄭陟)이 수궁(壽宮)을 미리 만들 것을 청하여 왕의 허락을 받았다는 기사가 나오고, 1444년(세종 26) 9월 3일자 기사에서는 벽을 이미 만들었다는 왕의 언급[『세종실록』 26년 9월 3일]에서 보듯이 세종대 중반 이후 재궁이 미리 만들어지는 제도는 시행된 것으로 보인다.
[의의]
재궁은 죽은 이의 시신이 직접 몸에 닿는 물건이므로 무엇보다도 극진한 예를 다해야 하는 대상이다. 그런데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 갑작스럽게 재궁을 제작할 경우 그 올바른 재목을 구하기 어렵고 회칠이 견고하지 못하기 때문에 국초부터 미리 좋은 재료를 사용하여 제작하고 매년 옻칠을 하였다. 이같이 재궁은 단순히 시신을 넣는 기구에 머무르지 않고 죽은 부모를 편안히 보내려는 자식의 지극한 정성을 보이는 상례의 중요한 대상이었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춘관통고(春官通考)』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주자가례(朱子家禮)』
■ 이범직, 『한국중세 예사상연구』, 일조각, 1991.
■ 지두환, 『조선전기 의례연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4.
■ 이범직, 「조선시대 왕릉의 조성 및 그 문헌」,『한국사상과 문화』36, 2007.
■ 정종수, 「조선초기 상장의례(喪葬儀禮) 연구」, 중앙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