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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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운서원(紫雲書院)

서지사항
항목명자운서원(紫雲書院)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서원(書院)
관련어백인걸(白仁傑),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성수침(成守琛), 성혼(成渾), 자운서원묘정비(紫雲書院廟庭碑), 「자운서원원규(紫雲書院院規)」, 자운지사(紫雲之祠)
분야교육 출판
유형집단 기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1615년(광해군 7)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에 세워진 서원.

[개설]
16세기 백운동서원을 시작으로 정착해 나간 서원은 사림의 활동이 본격화하면서 전국으로 확산되어 갔다. 경기 지역의 서원 건립은 명종대부터 퇴계(退溪) 이황(李滉)으로 대표되는 사림 세력의 활동이 이루어졌던 영남에 비해 시기적으로 늦지만, 선조 즉위 이후 각 지역에 건립되기 시작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자운서원 관련 기사가 12건이 있다. 내용별로 살피면, 서원 사액 기사 1건, 제향과 위차(位次) 시비 3건, 서원 이건 관련 파주 유생 등의 상소 1건, 서원 치제(致祭) 기사 7건이다. 이들 중 제향의 위차를 둘러싼 갈등은 당시 중앙에서 활동하던 정치 세력이 직접 개입하여 일어난 사건으로, 이는 자운서원의 정치적 위상이 매우 높았음을 반증해 주는 사실이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따르면 자운서원은 1615년(광해군 7)에 세워졌다. 건립 시기는 경기도의 다른 서원보다 늦지만, 파주 지역에서 서원 건립을 위한 움직임은 이전부터 있어 왔다. 선조 초 이이(李珥)가 중심이 되어 성수침(成守琛)을 제향하는 서원 건립을 추진하다가 임진왜란 발발로 인해 좌절된 이후 성수침·성혼(成渾)·백인걸(白仁傑)·이이로 대표되는 4현(四賢)을 함께 제향할 서원 건립 움직임이 그것이다.

하지만 광해군 연간에 4현 가운데 한 사람인 성혼을 주화오국(主和誤國)의 간신으로 매도하는 집권 세력의 편향된 시각 때문에 서원 건립을 추진하는 데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따랐다. 또한 내부적으로 4현을 위한 서원이 건립될 경우 그 위차에 대한 의견도 통일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파주 지역에서 내려오던 서원 건립 시도와는 별도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중심의 직계 문인들에 의해 자운서원의 건립이 먼저 추진되었다.

파주는 율곡 이이와 긴밀한 관계가 있는 지역이다. 이이가 대대로 물려받았던 전토(田土)가 있던 지역이었고, 이이가 성장하고 자신의 학문을 펼쳐 나갔던 곳이다. 또한 잠시 벼슬에서 물러나 머물면서 『성학집요(聖學輯要)』 등을 비롯한 여러 저술을 찬술한 곳이기도 하다. 이후 이이를 제향하는 서원 건립이 율곡의 문인 등에 의해 추진된 것도 이 같은 연고 때문이다.

서원 건립 초기의 상황을 알려 주는 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 않으나 당시 정국의 동향과 서원 건립의 추이를 통해 일면을 살필 수 있다. 서원이 건립되던 광해군 연간은 사림 정치가 전개되어 가면서 각 붕당(朋黨)마다 자기 당의 도학적 정통성을 담보하는 유학자를 세상에 드러내는 경향이 두드러지던 시기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1610년(광해군 2) 이황을 포함한 남인계 5현의 문묘 종사가 실현되고, 북인계 역시 그들의 학문 계보인 조식(曺植)과 서경덕(徐敬德)의 문묘 종사 추진과 곳곳에 서원 건립을 도모하고 있었다. 서인계 역시 이에 대처할 필요성을 느껴 자신들의 학적 연원인 율곡과 성혼을 내세우려는 움직임을 시작하였다.

자운서원의 건립이 이루어지던 광해군 연간은 영창대군 추대설과 연관된 계축옥사의 여파로 많은 서인들이 박해를 받던 때였다. 정국을 장악한 북인 세력이 폐모론을 거론하며 정국의 주도권을 오로지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자파가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릴 때 서인의 주축을 이루었던 율곡의 문인들은 서원 건립을 통해 자신들의 학파적 결속을 다지고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여 향후 재기의 기회를 모색하려 하였다.

[조직 및 담당 직무]
자운서원의 내부 운영을 살필 수 있는 원규는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가 찬한 「자운서원원규(紫雲書院院規)」가 있다. 총 21개조로 된 원규를 내용별로 살피면, 신입 원유(院儒)를 선발하는 규정인 취사지법(取士之法), 서원의 강학과 관리를 위한 인적 조직, 강학과 참배 등 서원에 머무르는 강유(講儒)의 일과를 기록한 부분, 일상생활 규칙과 금지 사항 및 처벌 규정 등으로 되어 있다.

서원의 조직은 당장(堂長), 유사(有司), 장의(掌議), 색장(色掌), 원감(院監)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규에 원장(院長)의 존재가 규정되어 있지 않지만, 경기 지역 유력 서원의 경우 중앙의 고위 관리가 원장을 겸임하므로 규정에 넣기 곤란한 점이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조직 구성 중 원감의 직무는 다른 서원에 비해 특이하다. 원감이란 칭호는 일반 서원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데 지방에 따라서는 원이(院貳)라 하여 부원장 정도의 지위를 갖는다. 여기서는 서원의 하전(下典)들에 대한 감독의 일을 맡았는데, 사족도 아닌 품관(品官) 중에서 부지런하고 일을 잘 아는 자[勤幹者]로 삼는다는 점이 특징이다. 현재 자운서원 원규의 실제 운영을 살필 수 있는 고왕록(考往錄)이나 전여기(傳與記)·도록(都錄) 등의 자료가 발견되지 않아 서원 운영의 구체적 실상은 알 수 없다.

[변천]
1650년(효종 1) ‘紫雲書院(자운서원)’으로 사액되었다. 당시 주강(晝講)에서 효종은 조광조(趙光祖)를 제향한 경기도 용인에 있는 서원에 사액하는 일을 논의하면서 성혼과 이이를 향사하는 서원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효종의 이 같은 관심은 곧바로 자운서원의 사액으로 나타났고, 이후 자운서원은 경기 지역 율곡 학맥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효종 말년 자운서원이 피폐해지자 송시열(宋時烈)을 중심으로 서원 중건이 이루어지면서 율곡의 묘소에서 호명산 아래(현 천현면 가야리)로 이건하였고, 이건한 자운서원에는 쌍묘(雙廟)를 두어 이이와 함께 휴암 백인걸도 제향하였다. 이건 후 송시열 등은 광해군 초년 한때 논의되었던 4현의 합향을 추진하려 하였지만, 여의치 않아 다시 원래의 위치로 옮겼다.

송시열은 서원의 기반을 충실히 하기 위해 자운서원묘정비문(紫雲書院廟庭碑文)을 찬술하여 율곡의 묘 아래에 세웠고, 해주에 있는 율곡의 후손을 파주로 이주시켜 서원의 관리를 맡겼다. 이처럼 송시열은 자운서원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였고, 그 과정에서 서원을 중심으로 문인과 지지 세력이 형성되었다. 그 때문에 숙종 연간 서인이 노론(老論)소론(少論)으로 분기해 나갈 때 자운서원은 송시열의 노론을 지지하는 파주 사림의 여론을 모으는 거점 구실을 하였다.

1695년(숙종 21) 5월 20일 파주 유학 정수하(鄭綏夏) 등의 상소로 박세채의 추향이 이루어졌다[『숙종실록』 21년 5월 20일]. 숙종 연간 윤증(尹拯)과 가까워 소론의 영수로 불리던 박세채는 파주 광탄의 남계에 만년의 거처를 마련하고 서당(書堂)을 지어 문도를 양성하는 한편 자운서원을 찾아 파주 일대의 사족들에게 강학을 하였다. 젊은 나이부터 율곡 학문의 계승자임을 자부하며 율곡의 문집을 자신의 기준으로 다시 편찬하였고, 율곡의 조제보합론(調劑保合論)에 근거하여 격화되어 가던 붕당 간의 정쟁을 해소할 방안으로 황극탕평설(皇極蕩平說)을 주장하였다. 이 같은 행적이 박세채가 세상을 떠난 뒤 서원에 제향되는 배경이 되었다.

박세채의 제향은 자운서원의 정치적 성향이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송시열을 중심으로 그의 문도들에 의해 운영되던 것이 박세채를 지지하는 소론계 성향의 인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운영이 이루어지게 되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박세채 제향을 통해 변화해 갔던 자운서원은 1713년(숙종 39) 노론계가 김장생의 제향을 주장하고 나섬으로써 갈등을 빚게 되었다[『숙종실록』 39년 5월 28일]. 당시 서원 제향의 일은 중앙 정치권에도 영향을 미쳤던 사안이었다. 일의 발단은 파주 유생 조익주(曹翊周) 등이 김장생을 서원에 제향하면서 기존에 두었던 위차를 수정해야 한다며 올린 상소를 조정에서 허락하면서 비롯되었다.

즉 이이의 적전(嫡傳)을 이은 김장생이 서원 제향의 반열에 오를 경우 위차는 당연히 배향(配享)으로 해야 하며, 이럴 경우 김장생보다 후배인 박세채가 병향(並享)하는 자리에 있을 수 없으니 기존의 위차를 폐지하고 율곡을 주향(主享)으로 두 사람을 배향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박세채의 위차를 병향에서 배향으로 내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박세채의 문인들은 즉각 반발하였다. 파주 유학 문후창(文後昌)과 전 현감 이헌좌(李軒佐) 등은 노론계의 주장대로 위차를 조정한다면 자신의 스승을 떨어뜨려 사실상 서원의 제향에서 내치는 출향(黜享) 조치라고 주장하였다. 박세채의 문인들은 노론계가 자운서원과 별다른 관련이 없는 김장생을 끌어 온 것은 박세채의 위차를 끌어내리려는 명분을 찾기 위해서라고 인식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중앙 정치가 노론 일당 전제로 운영되었던 상황에서 자운서원 제향은 노론의 의도대로 마무리되었다.

이후 파주 지역은 영조 이후 노론계 사림의 본거지인 자운서원과 소론계의 근거지인 파산서원(坡山書院)이 공존하는 형세를 보였다. 영조 연간 이후 자운서원에서는 국왕의 특명으로 치제가 자주 베풀어졌다. 특히 영조는 『성학집요』를 경연에서 강독하면서 서문을 친히 찬하였고, 유신을 보내어 치제하도록 하여 율곡에 대해 추숭하는 뜻을 드러내었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69년 지방 유림의 기금과 국비보조로 복원하여 1975년과 1976년에 보수하였다.

[의의]
자운서원은 『조선왕조실록』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서원이다. 현재 자운서원 소장 고문서들이 확인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왕조실록』과 문집 등의 관련 기록을 종합한다면 서원의 정치적·사회적 위상과 함께 경기 지역 서원의 존재 형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참고문헌]
■ 전통문화콘텐츠연구소, 『한국의 경기지역 서원』, 국학자료원, 2004.
■ 『한국역사용어시소러스』, 국사편찬위원회, http://thesaurus.history.go.kr/.

■ [집필자] 조준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