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자수궁(慈壽宮)

서지사항
항목명자수궁(慈壽宮)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궁가(宮家)
관련어비천당(丕闡堂), 수성궁(壽城宮), 신빈궁(愼嬪宮), 자수궁(慈壽宮), 창수궁(昌壽宮), 혜빈궁(惠嬪宮), 후궁(後宮)
분야왕실
유형건축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세종의 후궁들 중 왕자를 낳지 못한 후궁들이 세종 사후에 거처하던 궁가(宮家).

[개설]
자수궁은 1450년(문종 즉위) 태조의 서자(庶子) 무안군(撫安君) 이방번(李芳蕃)의 집을 수리하여 만든 곳이었다[『문종실록』 즉위년 3월 21일]. 세조 연간에 이곳에 별감(別監)·소친시(小親侍) 6인을 두어 시중들고 관리하게 하였다[『세조실록』 1년 11월 13일]. 성종 때에는 폐비 윤씨와 세조·예종의 후궁들이 살았으며[『성종실록』 16년 5월 7일], 연산군대에는 수성궁(壽城宮)에 거처하던 후궁들을 옮겨 살게 하였다[『연산군일기』 10년 5월 1일]. 명종대에는 인종의 후궁이 궁밖에 나가 살던 곳이기도 하다.

[위치 및 용도]
1472년(성종 3) 예조(禮曹)에서 계(啓)를 올렸다. 자수궁의 동쪽 냇물이 경복궁 영추문 수구(水口)로 흘러 들어오는 것을 막아 명당수의 맥을 보존하자는 것이었다. 이를 통하여 자수궁은 경복궁의 서편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성종실록』 3년 6월 16일].

자수궁은 세종 사후, 세종의 후궁들이 머무는 궁궐로 지어졌다. 후대에는 성종대 폐비 윤씨, 수성궁에 머물던 문종의 후궁들, 인종 후궁의 거처로 활용되었다.

[변천 및 현황]
세종에게는 8명의 후궁이 있었다. 영빈강씨(令嬪姜氏), 신빈김씨(愼嬪金氏), 혜빈양씨(惠嬪楊氏), 숙원이씨(淑瑗李氏), 상침송씨(尙寢宋氏), 귀인박씨(貴人朴氏), 의정궁주(義貞宮主) 조씨(趙氏), 혜순공주(惠順公主) 이씨(李氏)가 그들이다. 이들 중 신빈김씨와 혜빈양씨는 왕자를 낳아서 세종 사후에도 신빈궁(愼嬪宮)과 혜빈궁(惠嬪宮)을 하사 받아 생활하였다. 그러나 옹주만을 낳거나 자녀를 낳지 못한 나머지 후궁들은 자수궁으로 들어가 여생을 살았다.

1479년(성종 10) 폐비 윤씨를 자수궁에 살도록 하였고, 1485년(성종 16)에는 세조나 예종의 후궁도 들어가 살게 하였다. 세조의 후궁 중 근빈박씨(謹嬪朴氏)는 별도로 창수궁(昌壽宮)이라는 이름을 지어 내렸다. 1493년(성종 24) 자수궁 터가 습하고 비좁아 다른 곳으로 옮기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1504년(연산군 10)에 성종의 후궁들은 수성궁(壽城宮)에 살게 하고 문종의 후궁들을 자수궁으로 들이면서 자수궁을 제안대군(齊安大君)의 집으로 옮기려고 했다. 하지만 대궐과 가까워 불경 소리가 궐까지 들릴까 염려하여 잠시 임영대군(臨瀛大君) 집에 이배(移排)하였다가 별도의 정청궁이 지어지자 원래의 자리로 돌렸다. 명종대에는 인종 후궁의 처소가 되었다. 1765년(영조 40)에 자수궁을 헐어 그 목재로 성균관(成均館)의 비천당(丕闡堂)을 지으면서 훼철되었다[『영조실록』 41년 8월 8일].

■ [집필자] 정정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