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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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청(日記廳)

서지사항
항목명일기청(日記廳)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실록(實錄)
관련어실록청(實錄廳)
분야정치
유형집단 기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1506년(중종 1) 폐위된 연산군 당대의 사록인 『연산군일기』 편찬을 위해 임시로 설치한 관청.

[개설]
일기청은 연산군이 폐위된 후 『연산군일기』 편찬을 위해 설치한 임시 관청이다. 1506년에 설치된 후 일기 편찬을 마무리 짓고 1509년에 혁파되었다. 일기청의 구성은 다른 왕들의 실록 편찬을 위한 실록청(實錄廳)과 동일하였으나 책임자인 총재관은 실록청보다 등급이 낮은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가 임명된 것이 다르다.

[설립 경위 및 목적]
통상적으로 왕의 승하 뒤에는 실록의 찬수를 위해 실록청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의 경우 폐위된 왕이기에 그 명칭을 실록이라고 하지 않고 일기라 불렀다. 『연산군일기』 편찬을 위한 일기청은 정승들의 건의에 따라 1506년 11월 설치되었다[『중종실록』 1년 11월 16일]. 그러나 그것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던지 다음 해인 1507년 6월에 일기청을 다시 설치한 사실이 확인된다[『중종실록』 2년 6월 2일].

[조직 및 역할]
『연산군일기』 편찬을 위해 설치된 일기청에는 총재관 이하 기사관(記事官)까지 모두 67명이 임명되었다. 이들을 직급별로 보면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1명,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6명,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8명, 수찬관(修撰官) 5명, 편수관(編修官) 24명, 기주관(記注官) 7명, 기사관 16명 등이다.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할 때에 실무를 총괄하는 총재관은 대신급인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가 담당하였으나, 일기를 편찬할 때에는 정2품직이 감춘추관사로 임명되어 업무를 총괄한 사실이 주목된다.

『연산군일기』 편찬을 위해 1506년 일기청이 설치되면서 대제학 김감(金勘)이 감춘추관사에 임명되었고, 1507년 2월에는 대제학 신용개(申用漑)가 임명되었다[『중종실록』 2년 2월 17일]. 1507년 4월에는 일기청 관원을 정비하여 총재관에 성희안(成希顔)을, 도청당상(都廳堂上)에 신용개와 김전(金詮)을, 4개로 이루어지는 각 방의 당상으로는 김봉(金崶)·성세순(成世純)·성세명(成世明)·조계상(曺繼商)을 임명하였다[『중종실록』 2년 4월 11일].

일기청 소속 관원의 역할은 실록청의 경우와 동일하다. 일기의 편찬을 위한 최초 작업은 각 방의 낭청이 주로 하고, 각 방의 당상이 이들 낭청을 지휘·감독하였다. 각 방에서 작성하는 것이 초초본(初草本)이다. 초초본은 도청으로 보내져 검토되며, 도청의 낭청은 이를 바탕으로 중초본(中草本)을 작성한다. 도청의 당상과 총재관은 중초본을 검토한 뒤에 문장과 체제를 통일해서 정초본(正草本)을 작성하였다.

[변천]
『연산군일기』 편찬은 일기청 주도하에 1509년 9월에 마무리되었다[『중종실록』 4년 9월 12일]. 이어 며칠 뒤에 총재관 성희안이 전문(箋文)을 올렸고[『중종실록』 4년 9월 14일], 『연산군일기』 편찬이 마무리된 뒤에 일기청은 해체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김경수, 『조선시대의 사관(史官) 연구』, 국학자료원, 1998.
■ 오항녕, 「『일기청등록』해제」, 『일기청등록』, 한국고전번역원, 2005.
■ 이근호, 「영조대 『승정원일기』 개수 과정의 검토」, 『조선시대사학보』31, 2004.

■ [집필자] 이근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