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이문학관(吏文學官)

서지사항
항목명이문학관(吏文學官)
용어구분전문주석
동의어강이습독관(講肄習讀官), 이문문신(吏文文臣), 이문습독관(吏文習讀官), 이문이습인(吏文肄習人), 이학교수관(吏學敎授官)
관련어승문원(承文院), 이문(吏文), 질정관(質正官)
분야정치
유형직역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 외교문서에 쓰이는 이문(吏文)을 가르치던 승문원(承文院) 소속 관원.

[개설]
조선시대에는 이문 교육을 담당하던 부서는 승문원이었다. 이 승문원은 1408년(태종 8년)에 문서응봉사가 개편되면서 생긴 부서이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승문원에 이문을 배우는 이문습독관(吏文習讀官) 20명을 두고 교육했으며 뒤에 제술관 2명, 이문학관(吏文學官) 3명, 사자관 40명을 두었다고 하였다. 승문원에 소속된 이문학관은 중국과 왕래하는 문서에 쓰는 특수 문체인 이문을 전공, 외교문서를 관장한 관원이다.

[담당 직무]
이문학관은 이학교수관(吏學敎授官)·강이습독관·이문이습인(吏文肄習人)·이문습독관·이문문신(吏文文臣) 등 다양하게 지칭되었다. 이문 교육은 주로 승문원의 이문생도(吏文生徒)를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이문학관은 주로 문과에 새로 급제한 연소총민자로서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임명되었다.

이들은 이문이습(吏文肄習)을 전담하였으며 성균관·교서관·승문원의 승전(陞轉) 규례에 따라 서용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이문 예습뿐만 아니라 사대문서를 제술하고, 질정관으로 사행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변천]
이문학관은 시기에 따라 다양한 명칭이 있었다. 이것은 조선시대 이문 교육 정책의 변화 때문이다. 대중국 외교문서였던 이문이 대명(對明) 외교문서로서 등장한 것은 고려후기인 1370년(고려 공민왕 19)에 명에서 공민왕에게 보낸 자문(咨文)에서이다. 그런데 1331년(고려 충혜왕 1)에 이학도감(吏學都監)이 설치된 것으로 보아 이미 공민왕 이전부터 이문에 대한 학습이 시작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뒤이어 1389년(고려 공양왕 1)에 십학(十學)이 설치되면서 이학은 사역원에서 별도로 학습하게 되었다. 이때 사역원에 이학교수관을 두어 역어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이학을 가르쳤다. 따라서 이문학관의 기원은 바로 이때의 이학교수관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하겠다.

조선시대의 이문 교육은 승문원에서 담당하였다. 조선의 승문원은 고려의 문서감(文書監)에 이어 1404년(태종 4)에 응봉사(應奉司)라는 명칭으로 처음으로 나온다[『태종실록』 4년 8월 20일]. 이때의 응봉사는 외교문서를 관장하고 한어와 이문을 익히는 부서였다. 또한 1405년(태종 5) 8월에는 문서응봉사에서 이문을 강습케 하였다. 그리고 1408년(태종 8) 12월에는 이학에 밝은 30원을 뽑아 이문을 담당하게 하고 새로이 3품 아문을 설치하여 이문을 학습케 하였다. 이어 1411년(태종 11) 6월에 문서응봉사는 승문원으로 개칭되고 그 직제를 갖추기 시작하였다[『태종실록』 11년 6월 19일].

1413년(태종 13)에는, 사역원 학생들이 한음(漢音)만 오로지 익힘으로 의리(義理) 같은 것은 전혀 통하고 깨닫지 못하므로 사역원에 문신 훈도관을 두게 된다. 이어 1417년(태종 17) 3월에는 이문이습인(吏文肄習人)의 수가 적어지기 때문에 문과에 새로 급제한 인물 중에서 연소총민자 10인을 뽑아 권지부정자라 칭하고 이문이습을 전담하게 하였고[『태종실록』 17년 3월 30일], 같은 해 6월에도 승문원 참외관(參外官)을 증치하여 이문 예습과 사대문서 제술에 전념하도록 하였다[『태종실록』 17년 6월 11일].

세종대에는, 승문원은 사대에 관한 문서를 맡고 있기 때문에 이문을 학습할 수 있는 자를 택하여 그 임무를 겸하고 매월 그 예능을 고사(考査)하게 하였다[『세종실록』 1년 3월 4일]. 문과 이외에 별도로 보아오던 이문과를 혁파하여 승문원에서 이문을 익히게 하였다. 즉, 식년마다 문과에 급제한 인물 중에서 총민한 자를 선별하여 승문원에 소속케 하여 이문을 강습하는 임무를 전장하게 하였다.

그리고 문과에 응시하는 자에게는 이문을 겸하여 시험하여 합격한 자를 우선적으로 승문원에 보내도록 하였다. 그리고 날마다 승문원 녹관(祿官)과 한자리에서 꼭 읽어야 할 여러 가지 글을 한음으로 강습하도록 하고, 승문원 제조 한 사람을 시켜 날마다 고찰·장려하게 하였으며, 또 예조에서는 달마다 성적을 고사(考査)하여 두었다가 세초(歲抄)할 때에 그 기간의 성적을 통산해서 임용하는 자료로 하기로 하였다. 또한 승문원의 학관을 매삭(每朔)마다 고강하기로 결정했다. 1427년(세종 9)에 이르러, 예조의 의견에 따라 삼관의 예에 의거하여 4맹삭(孟朔)에 고강하게 하였다[『세종실록』 9년 2월 2일]. 개국 초에는 이문을 습독하는 데 정원이 없었다. 1425년(세종 7)에는 6명을, 1426년에는 12명을 더 임명하여 모두 18명이 되었으나 그 수가 많지 않다 하여 12명을 더하여 정원 30명으로 하고 총민한 의관 자제를 뽑아 수효를 채우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조치에도 불구하고 이문 교육은 제대로 이루어지 않아 그 대책으로 1442년(세종 24)에는 승문원의 이문생도 30명을 사역원의 강이관(講肄官) 30명과 합하고 정원을 30명으로 하고 나머지는 원하면 사역원에 합속시키는 조치가 취해지게 된다[『세종실록』 24년 8월 1일]. 이리하여 이문학이 독립적인 교육의 대상에서 제외되고 이문과 한훈으로 불리던 명과의 외교어가 결국은 중국어이기 때문에 서로 결부되고 말았다.

이러한 이문학과 역학의 결부 현상은, 승문원에서 중국어를 가르치기도 했고, 사역원의 강이관의 경우 한훈과 함께 이문을 함께 배우기도 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문학의 침체 현상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지속적으로 통제책이 강구되었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예를 들어 한어와 이문에 대한 장려 정책으로 명종대의 “이문문신제술(吏文文臣製述)을 친시(親試)하고 또 한어문신(漢語文臣)을 강시(講試)하였다.”는 기사와, 선조대의 “한어 이문 제술의 시험을 보게 했다.”는 등의 기사가 간혹 보이기는 하지만 침체 일로의 한어와 이문은 더 이상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참고문헌]
■ 박성주, 「高麗·朝鮮의 遣明使 硏究」, 동국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5. 8.
■ 박성주, 「朝鮮前期 對明 御前通事」, 『慶州史學』 제29집 , 경주사학회, 2009. 6.
■ 張舜順, 「朝鮮後期 通信使行의 製述官에 대한 一考察」, 전북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89.
■ 정다함, 「조선초기 습독관제도의 운영과 그 실태」, 『진단학보』 96, 진단학회, 2003. 12.
■ 정다함, 「朝鮮前期 兩班 雜學兼修官 硏究」,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8. 8.

■ [집필자] 박성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