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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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궁(離宮)

서지사항
항목명이궁(離宮)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궁궐(宮闕)
관련어경복궁(景福宮), 법궁(法宮), 별궁(別宮), 정궁(正宮), 창경궁(昌慶宮), 창덕궁(昌德宮), 행궁(行宮)
분야왕실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왕이 정궁에서 옮겨 지낼 목적으로 지은 궁궐.

[개설]
조선 왕조의 궁궐은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 법궁(法宮)과 이궁(離宮)으로 구분되어 운영되었다. 예를 들어 화재나 전염병으로 인해 궁궐 공간을 사용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도 왕실이 민가로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법궁은 왕이 거처하는 공식적인 궁궐 가운데서 으뜸이 되는 궁궐을 가리키고, 이궁은 부득이한 상황이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서 거처를 옮길 목적으로 지어진 궁궐을 말한다. 이궁은 법궁보다 격이 한 단계 낮기는 하지만, 법궁과 마찬가지로 제반 구성 요소를 모두 갖추었다.

[내용 및 특징]
궁궐에 화재가 나거나 뜻하지 않은 변고가 생겼을 때, 혹은 왕의 판단에 따라 궁궐을 옮겨야 할 때 상당한 기간 머물며 활동할 수 있는 또 다른 궁궐을 이궁이라 한다. 법궁과 이궁은 그 격이 다르지만 이궁 역시 왕이 때때로 임어하여 국정을 운영하는 정식 궁궐이기 때문에 정전, 편전, 침전의 주요 전각들과 궐내각사 등 궁궐이 가져야 할 요소들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고전적 의미에서 이궁은 “천자출유지궁(天子出遊之宮)”이라 하여 임시성을 띠고 있는 시설로 인식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행궁이나 별궁과는 격이 다르며 오히려 법궁과 동급의 궁궐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이궁으로 구분되는 창덕궁은 일시적인 이유로만 사용되었던 궁궐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선의 왕들은 화재나 전염병 같은 피치 못할 사정보다는 정치적 국면의 전환이나 개인적인 선호,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궁궐을 선택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특히 성종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작성된 의례 체계인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편찬하였으면서도 창덕궁에 오랜 기간 머물면서 국정을 운영하였다. 영조와 정조가 각각 경희궁과 창경궁에서 비교적 긴 시간 머문 것은 육상궁과 경모궁이 경희궁, 창경궁에서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그러나 법궁과 이궁 사이에는 견고한 인식의 차이가 존재하고 있었다. 고종대에 이르러 경복궁이 중건되고 경운궁이 정비되면서 조선의 궁궐 운영 체제는 큰 변화를 맞이하였다. 경복궁 중건의 명분이 조종조의 법궁을 되살린다는 것이었던 만큼, 법궁의 위상은 쉽게 깨뜨려지거나 변화하지 않는 것이었다.

[변천]
법궁과 이궁 개념은 조선초기부터 인식되고 있었다. 태조 연간에는 한양으로 천도하여 새 궁궐을 짓기 전에 임시로 머물던 한양부 객사를 이궁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개경의 궁궐을 염두에 둔 용례로서, 이때의 이궁은 정식 궁궐은 아닌 임시 거처라는 의미밖에 없었다.

태조대에 새로 지은 경복궁은 유일한 궁궐이었기 때문에 법궁과 이궁의 구분은 의미가 없었다. 태종대에 창덕궁이 창건되면서 비로소 법궁과 이궁의 체제가 완성되었다[『태종실록』 1년 7월 23일]. 성종 연간에는 창덕궁과 인접한 곳에 창경궁을 지으면서 창경궁도 창덕궁과 함께 이궁으로 인식되었다.

조선전기에 또 하나의 이궁으로 연희궁(衍禧宮)이 있었다. 1420년(세종 2) 당시 상왕이던 태종이 서쪽에 이궁이 없다고 하여 무악 남쪽에 서이궁을 지었다. 100칸 정도의 규모로 추정되는 이 궁궐은 1425년(세종 7)에 서이궁에서 연희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세종실록』 7년 8월 30일].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 하윤(河崙)이 일찍이 연희궁 터가 무악의 명당(明堂)이 되어 가히 도읍을 세울 만하다고 이야기 했는데, 태종이 이를 기억해 두었다가 이궁을 지으라고 명한 것이다. 세종은 이후 문종에게 정치를 맡기고 이곳에서 기거하였다.

1456년(세조 2)에는 왕이 연희궁에서 농사 상태를 살펴보고 돌아오는 길에 모화관에서 열병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세조실록』 2년 7월 6일]. 1505년(연산군 11)에는 연희궁을 수축하여 연회장으로 사용하다가 폐쇄하였다. 임진왜란으로 도성 내의 제반 시설들이 소실된 이후, 선조대에서 광해군대에 걸쳐 한양의 복원이 진행되었다. 경복궁 복원의 포기, 인경궁과 경덕궁의 영건, 인조반정과 창덕궁·창경궁의 소실 등은 조선후기의 궁궐 체제가 새롭게 정비되어 가는 과정에서 일어났던 주요 사건들이다. 이들 사건을 통해 조선후기의 궁궐 체제는 창덕궁-창경궁의 동궐과 경덕궁의 서궐이라는 두 궁궐의 사용으로 정착되었다. 그리고 조선 왕조의 법궁은 실질적으로 창덕궁, 이궁은 경덕궁에 그 의미가 부여되었다.

고종 초년의 경복궁 중건은 이러한 법궁과 이궁 체제에 다시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 일이었다. 경복궁 중건은 조선초의 경복궁 창건을 잇는다는 뜻을 표방하며 이루어졌고, 경복궁은 다시 본래 가지고 있던 법궁의 위상을 되찾게 되었다. 경복궁이 법궁으로 인식되면서 창덕궁과 창경궁은 이궁으로 여겨졌으며, 경덕궁에서 이름이 바뀐 경희궁은 왕궁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 홍순민, 『우리 궁궐 이야기』, 청년사, 1999.
■ 홍순민, 「조선왕조 궁궐 경영과 “양궐체제”의 변천」,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6.

■ [집필자] 이강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