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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에 공주·옹주·군주(郡主)·현주(縣主) 등과 혼인한 부마(駙馬)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관서.
[개설]
종래까지 공주나 옹주의 배필은 부마라 하였으나, 1434년(세종 16) 의빈으로 개칭하였다. 이는 부마라는 명칭이 천자의 사위를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의빈부는 설치 이후 정치 참여가 제한된 부마들의 예우를 담당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 초 부마들의 예우를 관장하던 관서로 이성제군부가 있었는데, 1417년(태종 17) 공신제군소로 개칭되었다가 다음 해 다시 이성제군부로 바뀌었다. 당시 이성제군부에는 부마 이외에도 공신들이 배속되었는데, 점차 부마와 공신을 각각 담당하는 관서로의 분화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에 1444년(세종 26) 부마부로 개칭되었다. 부마부 당시 경력과 도사를 두어 관서의 일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1466년(세조 12) 부마부를 의빈부로 개칭하였다. 조선조는 부마를 비롯해 종친의 정치적 개입을 철저히 금지하였는데, 이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이들만의 독립된 예우 관서를 설치한 것이다.
[조직 및 담당 직무]
1466년(세조 12) 의빈부 설치 당시 직제는 정·종 1품은 의빈, 정·종 2품은 승빈, 정3품은 부빈, 종3품은 첨빈에 봉하도록 하였다. 이후 1484년(성종 15) 3월 이를 개정하여 2품 이상은 위, 3품 당상은 부위, 3품 당하에서 4품까지는 첨위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이때의 개정 내용이 『경국대전』에 규정되었다.
여기서 품계의 차이는 배필의 차이에서 연유하는데, 공주에게 장가든 자에게는 처음에 종1품의 위를 주었으며, 옹주에게 장가든 자에게는 처음에 종2품의 위를 주었다. 부위는 군주에게 장가든 자에게, 첨위는 현주에게 장가든 자에게 각각 처음으로 주는 위계였다. 정원은 없었다. 이들과 함께 의빈부의 업무를 위해 경력과 도사 각 1원을 두었고, 이속(吏屬)은 서리 4명, 사령 6명, 군사 2명이었다.
의빈부 소속 부마는 원칙적으로 정치 활동이 금지되었고, 대신 왕실에 대한 일상적인 문안이나 병문안을 비롯해, 국상이 발생했을 때 진향(進香)하거나, 진연(進宴)이나 풍정(豊呈)에 참여하는 등 주로 왕실 관련 행사에 참여하였다.
단, 정국 상황 등에 따라 실제에서는 부마들의 정치 활동이 행해지기도 하였다. 1478년(성종 9)에는 왕명으로 중추부나 돈녕부 등과 함께 조계(朝啓)에 참여하도록 하였고[『성종실록』 9년 6월 10일], 효종대나 현종대에는 의정부나 삼사 등과 함께 죄인의 심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현종실록』 9년 12월 10일]. 이 밖에 『육전조례』에 따르면, 어진(御眞)의 봉심 시에 종친 및 규장각 신료들과 함께 참여하기도 하였다.
[변천]
『경국대전』에 규정된 직제는 조선조 이래 그대로 유지되다가, 고종대인 1869년(고종 6)에 개정이 이루어져, 공주와 옹주에게 장가든 자에게는 위 정1품을, 군주에게 장가든 자에게는 부위 종1품을, 현주에게 장가든 자에게는 첨위 종1품을 봉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때 의빈부에 궐원이 발생하였을 때는 종친부에서 해당 관서의 사무를 관할하도록 하였다. 1894년(고종 31) 종정부에 통합되면서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