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조선시대에 송골매, 매는 사냥에 이용되었다. 이러한 매를 사냥 용도로 길들이는 자를 응사(鷹師), 또는 응인(鷹人)이라고 하였다. 조선초기의 경우 매는 명나라에 진헌(進獻)하는 용도로 활용되었기에 응사들은 전업적으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담당 직무]
응사는 송골매를 사냥용으로 길들이는 일을 업으로 하였는데, 이들은 대개 관의 필요에 따라 사냥용 매를 진상하였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응사 3사람을 통진(通津)·해풍(海豊)·인천(仁川) 등지에 보내어 아골(鴉鶻)을 잡게 하였는데[『세종실록』 10년 7월 2일], 송골매는 명나라에 진헌하는 품목이었기 때문이었다. 1425년(세종 7)에는 해동청(海東靑)을 잡아서 바친 사정(司正) 강을부(姜乙富)와 응사 최득해(崔得海)에게 옷을 각각 한 벌씩 하사하기도 하였다[『세종실록』 7년 10월 26일].
응사는 특수한 신분으로서 군역(軍役)을 면제해주었으나 태종 때 풍해도(豊海道) 각 고을의 응사는 군역을 지기도 했다[『태종실록』 15년 6월 7일]. 대개 『조선왕조실록』 기사에서는 응사와 응인을 크게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고 있으나, 응사와 응인이 나란히 병렬적으로 기록된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세종실록』 11년 12월 19일], 엄격하게는 구분된 것으로 여겨진다.
[변천]
세종은 평안도·함길도·황해도감사(黃海道監司)와 절제사(節制使)에게 전지(傳旨)하여, 해동청을 진헌하되 각 고을에 소속된 응사에게 잡역(雜役)을 시키지 말고 해동청이 왕래하는 요지(要地)에 그물을 쳐서 이를 잡게 하고, 수령은 그들의 근태(勤怠)를 살피도록 하였다[『세종실록』 10년 3월 28일].
1420년(세종 2)에는 정역(鄭易)이 명나라에 송골매를 진상하자고 하자, 세종은 송골매는 얻기가 가장 어렵고, 그 재주와 품격[才品]이 날래고 사랑스럽지만 하루에 꿩을 한 마리씩 먹으니 기르기도 어렵고, 잘 길들여지지 않아서 혹시라도 날아가면 응사들이 송골매를 찾는다는 핑계로 촌락을 침노하고 소란하게 하니 그 폐해가 막심하다고 하면서 송골매를 길들이기 어려운 점을 지적하고 있다[『세종실록』 2년 5월 2일].
이런 폐해에도 불구하고 명나라에 진헌하기 위해서 수령의 감독을 강화하거나 응사와 응인에게 포상하는 일이 빈번하였다. 1429년(세종 11)에는 진헌사 호군 유강(柳江)이 황응(黃鷹)·농황응(籠黃鷹)·아골 및 해산물을 받들고 북경으로 출발하니, 유강에게는 유의(襦衣)·모관(毛冠)·갓·신·약(藥)을 하사하고, 응사와 응인에게는 의복·모관·갓·신 등을 하사하였다[『세종실록』 11년 12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