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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응방은 고려후기 충렬왕대에 처음 설치된 후 조선시대까지 설치와 폐지가 반복되었다. 조선 건국 직후에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궁궐에 내응방을 설치하였으며 궁궐 밖 한강 가에도 응방을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응방은 관상용 매뿐만 아니라 명나라에 조공으로 바치기 위한 매와 종묘(宗廟) 등에 진상할 매를 사육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응방은 고려후기인 1274년(충렬왕 즉위)에 설치된 관서로, 이후 치폐를 거듭하면서 존속하였다. 그러던 중 1371년(고려 공민왕 20)에 설치되었다가 다음 해인 1372년에 폐지된 뒤 조선 초에 다시 설치되었다. 응방의 설치는 원나라의 영향을 받아 설치한 것으로 원나라에 진상할 매와 고려 왕들의 매사냥을 위한 사냥매 조달 등을 위하여 설치되었다.
고려후기의 활발한 매의 사육은 조선 건국 후에도 이어지면서 계속적으로 응방이 설치되었다. 특히 명나라에 매를 조공으로 바쳐야 했고[『문종실록』 1년 11월 4일], 관상용으로도 필요했으며 종묘 등에 진상하기 위해서도 필요했다.
[조직 및 역할]
고려후기 응방에는 응방별감이 설치되었고, 이리간(伊里干)이라는 마을 단위로 운영되었다. 응방별감이 왕지(王旨)로써 이리간을 조성하고 응방호(鷹坊戶)를 선정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발이 만만치 않아 응방호의 규모를 줄여 나가다가 공민왕대에는 응방별감 대신 응방도감을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이어 조선시대에는 왕 직속으로 응방을 설치하였는데, 궁궐 밖에는 한강 가에 두었고[『태조실록』 4년 3월 1일], 궁궐 안에는 내응방을 두었다. 한강 가에 두었던 응방은 얼마 못 가서 폐지된 듯하다. 1403년(태종 3)에는 응방인을 16명으로 정하고 나머지는 모두 혁파하였다. 내응방은 내시와 별감, 그리고 응인(鷹人)인 시파치(時波赤)로 구성되었다. 실제적인 매의 사육이나 조련 등은 시파치가 담당하였다[『세종실록』 2년 10월 29일].
[변천]
조선 초부터 응방의 폐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1437년(세종 19) 창덕궁 서쪽에 있는 옛 이조(吏曹) 건물을 수리해서 해청(海靑)을 기른다는 김문기(金文起)의 비판에 대해 세종은 폐지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기도 했으나 끝내 폐지되지 않았다[『세종실록』 19년 2월 10일].
이후에도 필요에 따라 일시적으로 설치되었으며 폐지가 반복되어 1467년(세조 13)에도 좌·우응방을 폐지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때 완벽하게 폐지된 것은 아니어서 1470년(성종 1) 한정이 없던 각 지역에서 진상하는 매의 숫자를 제한하기도 한 것을 보면 다시 설치된 듯하다[『성종실록』 1년 7월 26일]. 이후에도 역시 몇 번의 설치와 폐지가 반복된 것으로 보이며, 연산군대에 이르러 응방이 확장되어 좌·우응방을 개수(改修)하였다. 군사 100여 명을 분속시켰고, 광흥창(廣興倉)에서 양미(粮米)를 지급하도록 하였으며, 창덕궁에 새롭게 응방을 만들기도 하였다[『연산군일기』 5년 2월 21일]. 중종반정 이후에도 응방은 폐지되지 않고 존속하였다.
[참고문헌]
■ 하현강교수정년기념논총 간행 위원회 편, 『한국사의 구조와 전개: 하현강교수정년기념논총』, 혜안, 2000.
■ 田川孝三, 『李朝貢納制の硏究』, 東洋文庫, 19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