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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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사(淫祀)

서지사항
항목명음사(淫祀)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제사(祭祀)
관련어음사(淫祠), 좌도(左道)
분야문화
유형의식 행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 사전의 정비 이후 관의 허가를 받지 않았거나 사전이 규정한 형식에 어긋난 제사 의례.

[개설]
사전(祀典)이란 조선시대에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행하는 각종 제사에 관한 규범이나 규정을 말한다. 사전을 설정하는 주체는 국가이고, 그 취지는 중앙 집권화, 또는 국가의 지방 통제에 있었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산천과 일월에 대한 치제(致祭)가 일원화되어 있지 않아 사적인 사제가 지역별로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었다. 사전의 개편은 이를 정비하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예로 1430년(세종 12) 8월 6일 예조에서 각 도에 있는 산천의 단묘(壇廟)에 대해 순심별감을 파견하여 다음과 같은 사례들, 즉 위패를 쓰지 않고 나무나 흙으로 신상(神像)을 만들어 섬기는 예, 대소 남녀들이 모여 음사(淫祀)를 지내며 풍악까지 올리는 예, 위판(位板)의 명칭을 격에 맞지 않게 잘못 쓴 예, 은그릇 등을 기명(器皿)으로 사용하는 예, 지전(紙錢)을 사용하는 예, 제물을 격식대로 쓰지 않는 예 등 사전에 맞지 않은 사항들을 조사하여 왕에게 보고하였다.

이와 같이 사전이 정비된 후에는 관의 허가를 받지 않았거나 형식에 어긋난 제사는 음사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모두 구체적인 단속의 대상으로 거론된 것은 아니었고, 어떤 제의가 음사로 지목될 때는 대개 지역적인 사정이 그 배경에 반영되어 있었다.

[연원 및 변천]
조선은 건국 이후 이전 왕조인 고려에서처럼 신은 하나인데 몇 곳에 나누어 제사를 지내고, 혹은 하루 동안에도 몇 곳에 제사를 지내는 등 제도적으로 정비되지 않은 모든 의례를 음사로 규정하였다[『태조실록』 1년 11월 17일]. 제도적 정비란 천자·제후·사(士)·서인이 각각 제사하는 신이 있어, 천자만이 천지에 제사하고 제후라야 산천에 제사할 수 있다는 등의 의례 원칙을 적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 백성들이 오랫동안 행해 온 산천 제사는 당연히 음사가 되며, 주로 별에 제사하는 소격전(昭格殿) 제사도 천자가 아닌 당대 왕의 격으로는 맞지 않은 것이었다. 성리학적 이념에 입각하여 조선의 제의를 제도화하려는 유신(儒臣)들의 입장에서는 이 모두가 음사로서 폐지 또는 수정되어야 할 사항이었다.

그러나 소격전, 또는 소격서(昭格署) 제사의 경우 중종대에 이르기까지 역대 왕이 그 종교적인 효험을 믿어 쉽게 폐지하지 못했으며, 백성들의 산천 제사도 지역적으로 편차가 있기는 하나 지역민들의 반발을 우려하여 폐지하자는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특히 백성들의 음사는 이사(里社)의 법을 세워 그 제도 아래에서 행해야만 규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나, 이사제 자체가 시행되지 못한 상황에서 이를 대체할 만한 제도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1392년(태조 1) 11월 17일 도평의사사에서 인재 천거와 부채 노비 방면, 음사 폐지 등 5가지 시무책을 제안한 것 중 세 번째로 거론된 음사의 폐지는 다음과 같다.

"왕께서 ‘종묘를 세우고 음사를 금지해야 될 것이니, 고려 왕조에서는 음사를 숭상하여 혹은 신은 하나인데도 몇 곳에 나누어 제사지내기도 하며, 혹은 하루 동안에도 몇 곳에 제사를 두 번 지내기도 하여 제사의 예전(禮典)을 번독(煩瀆)하고 문란하게 하여 멸망에 이르렀다’고 하였는데 도평의사사에서 의논을 적당하다고 여깁니다. 방금 하늘의 뜻에 순응하여 천명을 받아 한 시대의 정치를 혁신하게 되었는데, 다시 고려 왕조의 폐단을 따르게 할 수 없으니, 예조로 하여금 상정(詳定)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왕이, "음사의 금지는 예조에 내리어 상세히 상정하여 보고하도록 하라."고 하였다[『태조실록』 1년 11월 17일]

『동국문헌비고』 「예고(禮考)」에 실린 음사 조에서 음사의 연원과 변천의 대강을 살필 수 있다.

○ 고구려 동쪽에 대혈(大穴)이 있는데 수신(禭神)이라고 불렀다. 10월에 왕이 친히 제사지냈다.

○ 고려 현종 때 서경 목멱사(木覔祠) 신상(神像)에서 초제(醮祭)를 지냈다. 정종 때는 내전에서 초제를 지냈다.

○ 소격전이 개성부 궁성 북록에 있었다. (중략) 조선에서는 삼청동에 두었다. 백악신사(白岳神祠)가 백악산 정상에 있어 춘추로 초제를 지냈다. 목멱신사(木覔神祠)가 목멱산 정상에 있었으며 춘추로 초제를 지냈다. 이를 폐한 것은 1519년(중종 14)의 일이다. 이때 조광조(趙光祖)가 파할 것을 상소하여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복구되었다가 임진왜란 이후에 폐기되었다.

○ 1745년(영조 21) 왕의 특명으로 맹제(盲祭), 무제(巫祭), 독경제(讀經祭)를 모두 없앴다. 맹제와 무제는 기우 때, 독경제는 이어(移御) 때 해왔던 것이다. 정폐(停廢)된 지 오래되었고 태상제안(太常祭案)에만 남아 있던 것을 이때 제안에서도 모두 없앴다.

음사 조에 실린 위의 내용 중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초제에 관한 것으로, 임진왜란 이후 모두 폐기되었지만 초제를 지내던 사우는 그대로 남아 일제강점기인 1925년에 인왕산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국사당으로 불리며 존재해 왔다.

지방에서의 각종 제의에 대한 정비는 『국조오례의』의 규정과 더불어 시작되었으나 그 이전에도 이와 유사한 조치들이 있었다. 1406년(태종 6) 6월 5일에 『홍무예제』를 상고하여 개성 유후사 이하 부·주·군·현의 각 도 각 고을에 모두 사직단을 세워 제사를 행하고자 한 것이 그 예다. 이후 『국조오례의』의 규정에 따라 산천·성황·풍운·뇌우 등 여러 명칭이 붙던 단(壇)들은 성황사로 수렴되어 재배치되었다.

그러나 이미 성황사의 재정비가 있었던 고려말기와 마찬가지로 지방의 토호가 장악했던 사적인 성격의 사묘(祀廟)들은 대부분 존속되었다. 즉 지방의 주도 세력이 교체되는 시기, 또는 사족화하는 시기까지 기존 풍속의 본질에는 큰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방 세력의 교체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러한 기존 제의나 관행들이 음사로 비판되며, 이어 성황사에서 무격 행위를 금하는 등의 금제 조치들이 나온다. 이것은 음사에 대한 국가 정책의 일환으로 시행된 것이지만 지방 세력의 교체 또는 변화에 중요한 변수가 된 조치들이었다.

[절차 및 내용]
전라도 나주의 금성산(錦城山) 금성당(錦城堂)에서 지내던 제사는 조정에서도 비교적 빈번히 논의되었던 대표적인 음사였다. 『성종실록』 1478년(성종 9) 10월 13일의 기사를 보면, 예조에서 전라도 부녀가 금성산 음사에 가서 실행(失行)하는 것에 대해 가장과 수령에게 책임을 지울 것을 아뢰어 답을 들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무슨 내용인가 하면, 전라도의 백성들이 나주 금성산에 제사를 올리지 않으면 그 해에 반드시 질병이 있다는 요사한 말에 미혹되어, 가을 추수가 끝나자마자 도내의 백성들이 멀고 가까움을 가리지 않고 모두 가서 제사하였는데, 늙은이를 이끌고 어린이를 붙들며 가는 행렬이 길을 메울 정도였다. 그 산에 이르러서는 남녀가 섞여서 거처하여, 이로 인해 풍속이 음란해져 혹은 그 부녀를 잃은 자도 있었다. 딸을 시집보내는 자는 처녀를 데리고 먼저 금성당에 머물면서 산신에게 시집을 보낸 뒤에야 결혼을 시킬 수 있다는 말도 돌았다고 한다.

이에 예조에서, 이와 같은 폐풍(弊風)은 마땅히 엄하게 금지해야 할 것이라고 보고하여, 1491년(성종 22) 10월 16일에 금성산 성황사의 음사에 쓰이는 신미(神米)를 관에서 몰수하고 음사를 금하게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조치로 금성산의 음사가 폐지되지 않았음은 다음의 종종 때의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1514년(중종 9) 4월 21일 사도시정 김숭조(金崇祖)가, "나주 금성산은 나라 제사를 지내는 곳인데 먼 지방의 어리석은 백성들이 무당에게 혹해서 봄·가을이 될 때마다 시끄럽게 모여들어 남에게 뒤질세라 기도하여 재앙의 운세를 면하려고 밤을 지내기까지 하여 추한 소문이 많으니, 풍속을 손상하는 것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호조에 내린 왕의 전교에는 퇴미(退米)를 거두어 귀후서로 나르되 1년에 받아들이는 양을 60섬으로 항규(恒規)를 삼았으므로 수령이 능히 금하지 못하니, 빨리 쌀을 받아들이라는 영을 거두시어 음사의 폐해를 엄하게 금하소서."하고 아뢰었다[『중종실록』 9년 4월 21일].

이로부터 2년 후인 1516년에 김안로(金安老)가 왕께 "소위 음사라는 것은 외방(外方)의 성황당과 같은 것입니다. 성황신이 내렸다는 말이 나면 길이 인파로 메워지니 어찌 이와 같이 이치에 닿지 않는 일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같은 해에 기사관 유성춘(柳成春)도 아뢰기를, "근자에 이미 기신재(忌晨齋)를 혁파하여 모든 좌도에 관계되는 일이 다시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김안로가 아뢴 것처럼 외방의 성황당의 일은 매우 허망한데도, 성황신이 내려온다는 때에는 사족의 남녀까지도 모두 모여듭니다. 그 중에서도 나주 금성산의 성황사가 더욱 심합니다. 신의 장인 김숭조(金崇祖)가 나주목사로 있다가 갈려 온 뒤에 금성산 성황사에 내주는 쌀 60여 석을 거두어들이지 말 것을 청하여 윤대에서 아뢰었는데 아직도 시행하지 않습니다. 나라에서 성황당사에 쌀을 내주면서 어찌 민속의 폐단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아뢰었으나, 이때도 역시 왕의 비답을 얻지 못하였다[『중종실록』 11년 6월 3일].

관제 성황사가 아닌 성황당, 그리고 관제일지라도 지방의 토호가 장악하고 있고 지방민의 참여로 왕권의 대행자인 수령이 주도하지 못하는 음사적 성황사는 탄압의 빌미를 제공하기에 충분하였다. 실제로 지방으로 진출하려는 중앙 사족, 또는 이미 외래하여 지방에 터를 잡기 시작한 사족들은 이를 문제 삼아 중앙 정부의 힘을 끌어들여 지역 세력들을 약화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금단의 조치가 있었지만 음사가 근절되지 않은 것은 이에 참여하는 기존 세력의 지역적 기반이 공고했기 때문이다. 또한 국왕이 이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은 소수인 사족의 입장보다 다수를 차지하는 기존 세력과 백성들의 반발을 더 의식했기 때문이다.

1566년(명종 21) 1월 25일 개성부에서는 유생들이 송악산 산신총사를 음사적이고 좌도적인 폐습이라 하여 소각한 일이 일어났는데, 이에 대해 정부에서 의금부 낭청을 보내 주모자들을 옥에 잡아다 놓고 국문하기를 마치 대죄를 다루듯이 하려 하였다. 이에 대해 사헌부에서 유생들을 나추(拿推)하지 말아 달라고 청하였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 이 경우는 지방 음사에 대한 정부의 정책이 현지에서보다 오히려 미약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러나 유생들의 행위나 이를 두둔한 사헌부의 청에서 보듯이 지역 사정에 따라 편차는 있더라도 지방의 음사들이 점차 위축되어 가는 추세였음을 알 수 있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음사(淫祠)는 음사(淫祀)가 치러지는 사당이다. 국사당(國師堂, 國祀堂)은 원래 조선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한 뒤 서울의 수호신사(守護神祠)로서 북악신사(北岳神祠)와 함께 남산 꼭대기에 세운 사당으로 목멱신사(木覓神祠)라고 불렀는데, 임진왜란 이후에 무당이 굿을 하고 민간인이 기도하는 음사로 변하였다. 국무당(國巫堂)은 국가적 행사로서 굿을 주관하게 하기 위하여 도성 안에 두었던 무당이다. 고려 명종 때 설치되었으며, 여말선초에 주자학이 들어오면서 음사라 하여 폐지되었다가 다시 부활하였다.

앞서 인용한 전라도 나주의 금성산에는 금성산사가 있는데 사전에는 소사(小祀)로 기록되어 있다. 사당이 다섯 군데에 있었는데, 상실사(上室祠)는 산꼭대기에 있고, 중실사(中室祠)는 산허리에 있으며, 하실사(下室祠)는 산기슭에, 국제사(國祭祠)는 하실사의 남쪽에, 예조당(禰祖堂)은 주성(州城) 안에 있다.

[참고문헌]
■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 한우근, 『유교정치와 불교 -여말선초 대불교 시책-』, 일조각, 1993.
■ 김태영, 「조선 초기 사전(祀典)의 성립에 대하여」, 『역사학보』58, 1973.
■ 정승모, 「성황사의 민간화와 향촌사회의 변동」, 『태동고전연구』7, 1991.
■ 정승모, 「군현제의와 국가정책」, 『조선은 지방을 어떻게 지배했는가』 대우학술총서 477, 2000.
■ 지두환, 「조선 전기 국가의례연구 -주자학 수용 과정과 관련하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0.

■ [집필자] 정승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