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1394년(태조 3) 도읍을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개성에 부윤부(府尹府)를 설치했다. 1395년에 개성부윤부를 유후사로 고쳤다. 1438년 다시 유후사를 유수부로 고치고 유수를 파견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유후사라는 명칭은 주나라 성왕이 주공을 낙양에 머물러 다스리게 한 데서 나왔다. 개경유후사의 설치는 한양 천도로 인한 고려 구세력의 불만을 진정시키고, 한편으로는 이들을 견제하고 감시하는 차원에서 시행되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전 왕조의 수도를 우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외 고려 왕릉과 사당에 대한 제사, 이성계의 사저인 경덕궁의 관리, 명나라 사신의 접대를 위해서도 개경은 특별대우를 할 필요가 있는 지역이었다.
[조직 및 역할]
개성유후사에는 정2품 유후 1명과 부유후 2명을 두었다[『태조실록』 4년 6월 13일]. 유후사는 중앙 관아였고, 경기도관찰사의 지배를 받지 않는 완전한 독자 행정 구역이었다.
[변천]
1395년에 설치된 개성유후사는 1438년에 의정부가 ‘유후사는 정확한 명칭이 아니니 당나라와 송나라의 제도에 의해 개성부로 고치자’는 요청에 따라 개성유수부로 개칭되었다[『세종실록』 20년 10월 15일]. 유후사를 계승한 개성유수부는 조선말까지 계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