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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천사건(柳川事件)

서지사항
항목명유천사건(柳川事件)
용어구분전문주석
동의어유천일건(柳川一件), 국서개작(國書改作)
관련어소 요시나리[宗義成], 야나가와 시게오키[柳川調興]
분야정치
유형사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1606~1624년 조선과 일본 사이에 오간 외교문서를 대마도주가 위조한 사건.

[개설]
일본에서 대(對) 조선 외교와 무역을 독점하고 있었던 대마도는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국서를 개작하였다. 이는 1635년에 유천(柳川, [야나가와])씨의 폭로로 드러나게 되었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대마도의 외교적 지위를 비롯한 양국 간의 외교가 정비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일본에서는 이 사건을 소위 유천일건(柳川一件)이라고 한다.

[역사적 배경]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일본에서는 국교 재개가 큰 현안이 되었다. 조선은 피침략국으로서 일본과의 국교 재개를 쉽게 용납할 수 없었지만, 북방의 여진족이 점차 흥성하는 가운데 전란의 위험을 크게 느끼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은 남쪽 지역의 안정을 위하여 대일 외교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에 잡혀간 수많은 조선인 포로들을 쇄환하기 위해서도 국교 재개가 이루어져야 하였다.

한편 일본은 새로운 정권의 성립기를 맞아 국내외적인 안정을 도모하고 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조선과의 국교 정상화가 필요하였다. 또한 국교 재개를 통하여 이웃나라 왕으로부터 정권을 공인받는다면, 정권에 국제적 위신을 더하게 되고 국내 제후와의 격차를 분명히 할 수 있었다. 대외적으로도 조선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조선이 참여하고 있는 동아시아 질서 속에 포함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양국의 국교 재개를 원하던 일본의 대마도 외교 관계자들은 국서 개작을 통하여 양국 간의 갈등을 무마하고자 하였다. 대마도는 실정막부(室町幕府) 이후 조선에 대한 외교를 담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과의 무역도 독점해 왔다. 대마번의 재정은 조선과의 무역을 통하여 충당되었기 때문에 조선과의 국교를 조속히 회복하는 일은 대마번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이에 대마번에서는 조선에 국교 재개 요청 사절을 여러 차례에 걸쳐 파견하였으며, 국서 개작까지도 반복하게 되었던 것이다.

[경과]
1. 국서 개작의 배경

국서 개작은 1606년(선조 39)부터 1624년(인조 2)에 회답겸쇄환사의 파견 과정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조선에서 요청하는 일본 막부 장군의 국서 위작, 국서 형식의 개작, ‘국왕(國王)’의 칭호 위조 등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국서 개작은 모두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 그의 외교승(外交僧)인 이정암(以酊庵)의 주지 현소(玄蘇, [겐소]), 그리고 도주의 가신이었던 유천조신(柳川調信, [야나가와 시게노부])과 그의 아들 유천지영(柳川智永, [야나가와 토시나가]) 등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2. 국서 개작의 과정

최초의 국서 개작은 1606년에 이루어졌다. 당시 조선은 국교 재개의 교섭 타결 과정에서 일본의 성의를 시험하고 국교 정상화의 명분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일본에 2가지 선행 조건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일본에서 먼저 조선 왕에게 국서를 보낼 것, 전쟁 중에 성종과 중종의 능을 파헤친 범인을 잡아 보낼 것 등이었다. 이는 일본이 조선에 전쟁의 책임을 시인하는 일이 되기 때문에 사실상 쉽지 않은 조건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곧 ‘일본국(日本國) 원가강(源家康)’ 명의의 국서와 함께 왕릉을 파헤친 범인으로 마고사구(麻古沙九)와 마다화지(麻多化之) 2명을 압송해 옴으로써 조선의 요구에 화답하였다.

이 국서에 대한 조선과 일본의 기록을 검토해 보면, 덕천가강(德川家康,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국서는 진본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조선에서도 국서와 범인들의 진위 여부를 둘러싼 논의가 여러 차례 있었으나, 일본의 국서로 인하여 명분도 얻고 주체성도 견지하면서 화호(和好)할 수 있었으므로 강화 교섭을 위한 사절 파견을 결정하였다.

1607년(선조 40) 정월 정사 여우길(呂祐吉), 부사 경섬(慶暹), 종사관 정호관(丁好寬)을 비롯한 제1차 회답겸쇄환사 일행 460여 명이 일본에 파견되었다. 이들은 에도에서 당시 막부 장군이 된 덕천수충(德川秀忠, [도쿠가와 히데타다])을 만나 선조의 국서를 전달하였다. 이 국서는 회답사라는 사절단의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덕천가강이 보낸 국서에 대한 회답서의 형식을 갖추고 있었다. 이에 대마도에서는 조선의 국서를 개작하여 일본에서 국서를 보냈던 사실을 감추려 하였다.

국서 개작은 조선 국서의 원문에서 총 24자를 지우고 18자를 새로 써 놓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조선이 국서를 올린다는 의미로 회답이라는 의미의 ‘봉복(奉復)’을 ‘봉서(奉書)’라 고쳤다. 그리고 조선이 일본에서 성의를 보내왔기 때문에 그 뜻에 답한다는 의미를 완전히 반대로 만들어, 조선에서 옛 외교 관계의 부활을 요청하는 것처럼 바꾸었다. 그리고 예물의 물량을 늘리기 위하여 별폭(別幅)도 개서하였다.

이러한 개작은 조선의 국서가 일본의 서계에 대한 답서의 형식을 띤 것이었으므로 불가피한 일이었다. 만약 조선의 국서를 원문 그대로 장군에게 전달한다면, 그들의 국서 위조 사실이 노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은 1607년의 회답겸쇄환사를 계기로 일단 대일 외교 관계를 정상화시켰고, 1609년(광해군 1)에는 기유약조를 체결함으로써 조선후기 대일 외교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한편 일본에서는 1615년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오사카를 거점으로 하고 있던 풍신수뢰(豊臣秀賴,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완전히 몰락시킴으로써, 일본 전역을 통일하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1614년 풍신수길의 아들인 수충(秀忠, [히데타다])과 천황가의 혼인을 이유로 일본은 조선에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였다. 덕천막부가 오사카를 완전히 평정할 즈음에 조선 사절을 맞이함으로써 막부의 위세를 내외에 과시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조선은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였으나, 한편으로는 덕천가강의 서거 등으로 일본 국정(國情)을 탐색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따라서 만약 일본이 먼저 국서를 보내 성의를 보인다면 사신을 파견할 의사가 있다고 통보하였다. 1617년(광해군 9) 5월 일본에서 ‘일본국왕 원수충(源秀忠)’ 명의의 국서를 보내오면서 사신 파견을 요청함에 따라 조선은 같은 해 7월에 일본으로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것이 정사 오윤겸(吳允謙), 부사 박재(朴梓), 종사관 이경직(李景稷) 등을 삼사(三使)로 한 제2차 회답겸쇄환사였다.

그런데 일본에서 보내온 이 국서도 위조 가능성이 높다. 대마도에서 온 국서는 ‘일본국왕 원수충(源秀忠) 봉서(奉書)’로 되어 있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왕과 대등하게 국서를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일본국왕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일본 측에서 조선 왕의 외교 대상이 되는 장군(將軍, [쇼군])에게 왕호(王號)가 없다면 대등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조선 외교의 명분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비록 장군이 국정의 지배권을 가진 주권자였지만, 장군은 천황에 의하여 임명되어 그 위계가 명확하게 구분되었으므로 호칭을 쉽게 바꿀 수 없었다. 이에 대마도에서는 일본에서 조선에 보내는 국서에 일본국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개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뿐 아니라 조선의 사신단이 지참한 국서도 회답 형식이었기 때문에 대마도는 이전처럼 내서(來書)의 형식으로 개작해야 하였다. 일본의 기록에 남아 있는 조선 왕의 국서 형식이 ‘봉서’로 되어 있는 것은 그 때문인 듯하다. 그리고 덕천수충의 답서가 ‘일본국(日本國) 원수충’으로 작성되자, 조선 사신들의 항의에 직면한 대마도는 조선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왕’ 자를 삽입하여 ‘일본국왕 원수충’으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개작은 1624년의 제3차 회답겸쇄환사의 파견 때도 발생하였다. 이때는 조선과 일본 모두 새로운 정권이 성립된 정치적 전환기였다. 조선에서는 1623년 인조가 서인(西人)에 의하여 옹립되었고, 일본에서는 1623년 7월 덕천수충이 아들 덕천가광(德川家光, [도쿠가와 이에미쓰])에게 장군직을 물려주었다. 1623년 8월 대마도에서는 현방(玄方, [겐보])을 사신으로 보내 덕천가광의 장군직 습직(襲職)을 통고함과 동시에 사신단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대마도의 사절 파견 요청은 막부 장군의 강력한 의지에 따른 것이었다. 조선으로부터 덕천가광의 정권이 승인을 받고 집권 초기에 국제적인 행사를 함으로써 인심을 안정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이에 대하여 신중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결국 1624년 5월에 사절을 파견한다고 결정하였다. 이러한 결정에는 후금 세력의 팽창에 따른 긴장감 고조 및 대마도의 연속적인 사자 파견과 그에 따른 경제적 부담 증가 등도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장군 습직 축하가 아니라 회답겸쇄환사라 칭하여 사절단을 파송하였다. 이 사신단은 정사 정립(鄭立), 부사 강홍중(姜弘重), 종사관 신계영(辛啓榮) 이하 460여 명의 대사절단으로 구성되었다. 이 당시에도 대마도는 조선에서 보내는 국서의 내용을 부분 개작하였으며, 예물 목록인 별폭에서도 그 수량을 늘림으로써 막부 장군의 환심을 사려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일본에서 조선에 보내는 답서에 ‘일본국주(日本國主) 원가광’이란 명의로 되어 있어서 조선 측이 이의를 제기하자, 유천조흥(柳川調興, [야나가와 시게오키]) 등이 ‘국주’를 ‘국왕’으로 고친 국서를 가져왔다. 이것도 대마도 관계자들에 의하여 개작된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제까지 살펴보았듯이 막부는 대마도에 조선 사절의 도일(渡日)을 명령하면서도 일본 국서를 우선 조건으로 회답사를 파견하려는 조선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대마도가 국서를 위조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였다. 그리고 이 때문에 답서의 형식을 가진 조선 국서를 다시 내서로 위조해야만 하였다.

이 같은 국서 위조 행위는 모두 조선과의 관계 유지를 원하였던 대마도가 불가불 행한 대응책이었다. 특히 일본 국왕의 칭호를 둘러싼 위조는 조선이 명을 중심으로 하는 중화적 교린 체제를 유지하려고 한 반면, 명으로부터 책봉을 받을 수 없었던 막부에서 일본국왕을 쓰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야기된 것이었다. 이는 조선과 막부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본질적으로 해결되기 어려웠고, 결국 조선과 막부의 중간에 있었던 대마도에 의해 국서 개작 내지는 위작이라는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해결되었던 것이다.

3. 국서 개작의 폭로와 결과

국서 개작이 공식적으로 조선에 알려지게 된 시기는 1636년(인조 14) 통신사 파송 때였다. 그러나 사건의 내막은 1631년(인조 9)부터 대마도주 종의성(宗義成)과 그의 가신 유천조흥(柳川調興) 사이의 세력 다툼으로 서로의 잘못을 막부에 제소하는 가운데 밝혀져 있었다. 유천조흥은 대마도주의 가신이었으나, 막부와의 친밀한 관계를 바탕으로 대마도주를 능가하는 세력을 갖게 되면서 점차 불화를 빚었다. 결국 유천조흥은 대마도주 종의성에게 영지 및 무역선 파견의 권리를 반납하고 군신(君臣)의 단절을 알리는 한편, 대마도주를 막부에 제소하였다.

이 일을 막부의 장군 덕천가광이 직접 심리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유천조흥이 장군의 서한을 위조한 일 등이 밝혀지게 되었다. 유천조흥은 결국 패소하여 유배형에 처해졌으며, 조선 외교와 문서 작성에 관여한 인물들도 처형되었다. 일본은 대마도의 외교 관계자들에 의한 국서 개작 사건을 1636년(인조 14) 조선통신사 일행에게 분명히 밝혔고, 막부 장군의 국서를 통하여 이 사실을 공식적으로 통보하였다. 그리고 막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 외교 체제를 새롭게 정비하였다.

그 결과 일본에서 보내는 서한은 일본 연호로 하며, 장군의 칭호는 ‘대군(大君)’으로 하겠다는 방침을 세우고 조선에 알렸다. 일본 국왕이 아닌 대군이라는 칭호를 새로 설정함으로써 일본은 그동안 국서 개작의 주요 부분이었던 칭호 문제를 해결하였다. 장군을 대군으로 표기함으로써 일본 국내에서 천황과의 관계를 고려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국왕 책봉을 전제로 하였던 중국적 화이 질서로부터 벗어나서 새로운 국제 질서 체제를 만들어 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막부는 대마도의 이정암에 외교승을 윤번(輪番)으로 파견하여 조선에 대한 외교를 직접적으로 감독하는 제도를 시행하게 되었다. 조선에 대한 서한은 동복사(東福寺) 보승원(寶勝院)의 옥봉인서당(玉峰璘西堂)이 전담하고, 이후는 대마도의 동사(同寺)에 윤번승을 상주시켜 그 임무를 맡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막부가 조선 외교를 통제하겠다는 뜻이고, 무역을 제외한 교섭의 전체를 막부에서 관장한다는 의지를 보여 준 것이었다.

[참고문헌]
■ 강재언, 『조선통신사의 일본견문록』, 한길사, 2005.
■ 미야케 히데토시[三宅英利], 『조선통신사와 일본』, 지성의 샘, 1996.
■ 손승철, 『조선시대 한일관계사 연구』, 경인문화사, 2006.
■ 유재춘, 「임란 후 한일국교 재개와 국서개작에 관한 연구」, 『강원사학』 2, 1986.

■ [집필자] 백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