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순명효황후는 1897년(광무 1)에 황태자비가 되었는데, 순종이 즉위하기 전인 1904년(광무 8)에 승하하여 유강원(裕康園)에 모셔졌다. 순정효황후는 1907년(융희 1)에 황태자비로 책봉되었고, 그 해 7월 순종이 즉위함에 따라 황후가 되었다. 1926년에 순종이 승하하자 홍릉(洪陵) 왼편에 유릉을 조성하고 순명효황후를 천장해 합장하였다.
[조성 경위]
순명효황후는 1904년에 승하 당시 황태자비의 신분이었다. 그가 승하하자 용마산 기슭에 안장하고 원호를 유강원이라 하였다. 1907년에 순종이 즉위하면서 황후로 추존되었고, 유강원 또한 유릉으로 격상되었다. 그 뒤 1926년에 순종이 승하하자 홍릉 왼쪽 언덕에 유릉을 조성하고 순명효황후의 재궁(梓宮)을 옮겨 와 합장하였다. 1926년 5월 7일 산릉 터에 풀을 베고 흙을 파헤치는 일을 시작하여 6월 10일에 발인하였다[『순종실록부록』 19년 5월 5일].
[조성 상황]
유릉은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고종과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능인 홍릉 옆에 있다. 1926년 4월 25일에 순종이 승하하자 홍릉 왼쪽 언덕에 봉표(封標)를 세운 뒤 침전과 가침전, 비각 등에 대한 공사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한국학중앙연구원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는 「홍릉배치도(洪陵配置圖)」를 살펴보면, 당시의 건물 생성과 소멸 과정을 유추할 수 있다. 이 지도에 의하면, 능상(陵上)과 바로 면해서 담장이 둘러져 있고, 그 담장 너머 우측에 건물이 세워져 있다. 봉표를 세운 능상은 서쪽을 향하고 있는데, 이는 묘좌유향(卯坐酉向), 즉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앉은 자리에 봉표를 세웠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과 일치하며[『순종실록부록』 19년 5월 5일], 현존하는 유릉의 방위와도 같다. 능상은 서향으로 봉표를 세운 반면, 침전과 홍살문은 능상을 기준으로 서북향으로 축을 달리하여 봉표를 세웠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된 「유릉명기배치도(裕陵明器配置圖)」를 보면, 동원삼실(同園三室)의 현궁 전면에 명기가 배치되어 있다. 그림을 보면, 순종과 순명효황후의 현궁 전면에만 명기를 둔 상태이니, 순정효황후의 현궁실을 미리 만들어 두었음을 알 수 있다. 명기란 죽은 사람과 함께 무덤에 묻기 위해 그릇이나 악기, 생활 용구 등을 본떠 실물보다 작게 상징적으로 만든 물건을 말한다.
재실은 홍릉의 재실을 사용하였는데, 예산 절감과 시대 상황 등의 이유로 따로 재실을 조성하지 않았다. 이는 결과적으로 1901년(광무 5) 경 홍릉 조성 당시에 지은 내재실·어재실·예재실 등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변천]
유릉은 동원삼실의 합장릉이다. 다른 조선왕릉에서는 능침 전면에 배치되어 있는 석물들이 침전 전면에 놓여 있다. 또한 기존의 양석과 호석이 생략되고, 그 대신 석인과 석수들이 배치되어 있다. 능침은 반구형의 봉분과 12면의 병풍석을 설치하였다. 능침 둘레로는 12칸의 난간석을 둘렀는데,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는 「유릉봉분개수공사설계도(裕陵封墳改修工事設計圖)」를 살펴보면, 상세한 현황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