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내용]
위장은 5사(司)가 5위로 바뀐 1457년(세조 3)에 설치되었으며, 처음에는 한 위에 한 사람이 각 위를 분담·통솔하였으나, 『경국대전』에서는 12명의 문·무관이 겸직하게 되었다. 위장은 궁내에 입직하여 5위 소속의 군사를 분정받아 순시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 외에도 조정에 연회나 경축행사가 있을 때 소속 군사를 거느리고 궁성에 정렬하기도 했다. 이처럼 5위장은 왕 주변에서 군대를 통솔하는 관직이므로 대군이나 임금의 신임을 받은 관료가 임명되었다. 1일 3명씩 차례를 나누어 입직하며 3일 만에 교대했다. 입직했을 때는 동·서·남 세 곳을 나누어 각각 군사 10명을 거느리고 대궐과 도성의 내외를 순행했다. 왕의 궁궐 밖 행차를 수행할 때에는 휘하 장교와 군사에 대해 태형(笞刑) 이하의 범죄를 바로 처단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으며, 그 이상의 범죄는 왕에게 보고하여 척결했다. 조선후기에 5위의 기능이 유명무실해지면서 정3품직으로 격하되었고, 2명은 조사위장(曹司衛將)이라고 하여 문관을 임명했다. 뒤에 1명은 반드시 문관으로 임명했으며, 또 1명은 문음무관(文蔭武官)에서 통차(通差)했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3명을 증원하여 15명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