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정의]
조선시대 왕이 국정을 처리하기 어려운 시기에 승정원에서 국정을 논의하였던 의정 또는 재상. 그러한 의정 등으로 구성된 기구.
[개설]
원상(院相)은 1467년(세조 13) 9월에 세조가 병으로 명나라 사신의 접대를 주도할 수 없게 되자, 원임(原任) 재상에게 승정원에서 당직하며 일을 처리하도록 함으로써 설치되었다. 이후 세조 말에 원임과 시임 재상 15명을 4개의 번(番)으로 구성하여 운영하였다. 이러한 원상은 1476년(성종 7) 5월까지 10명 내외로 유지되었다. 연산군 이후에는 왕의 즉위 초에 삼의정으로 원상을 설치·운영하였으며, 유지 기간은 사정에 따라 달랐다. 선조 이후 의례화하였는데, 대체로 즉위 초 국상의 공제(公除)까지 삼의정이 원상을 맡았다.
[담당 직무]
원상의 기본 기능은 백관을 총괄하고 서무를 다스려 나라를 경영하는 의정부와 왕명(王命)을 출납하는 승정원의 기능을 통합한 것이다. 원상은 국정 전반에 걸쳐 왕의 자문에 응하고 필요한 경우 서무를 논의·처리하였으며, 왕명의 출납도 총괄하였다. 의정은 경연의 영사(領事)를 겸하였기 때문에, 왕의 나이가 어릴 경우에는 원상이 경연에서 고문에 응하는 경우도 많았다.
[변천]
1) 원상의 설치와 운영
원상은 1467년 9월에 처음 설치되었다. 당시 명나라에서는 건주위(建州衛) 정벌을 위해 사신을 파견하였다. 마침 세조가 병이 들어서 사신을 맞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전부터 서무 처리에 참여해오던 대신(大臣) 신숙주(申叔舟)·한명회(韓明澮)·구치관(具致寬)에게 승정원에 나와 의논하여 사신 접대 문제를 처치하도록 하면서 원상을 처음 설치하였다.
‘원상’이란 용어는 『조선왕조실록』 1468년 4월 기사에 처음 보인다. 그해 9월에 예종이 즉위하자 세조의 유명(遺命)에 따라 원상을 4개의 번으로 재편성하여 궁궐에 나아와 승정원에서 국정을 의논하게 하였다. 이때에 원상은 정인지(鄭麟趾)·구치관·홍윤성(洪允成)·김질(金礩)·정창손(鄭昌孫)·심회(沈澮)·조석문(曺錫文)·김국광(金國光)·신숙주·박원형(朴元亨)·홍달손(洪達孫)·노사신(盧思愼)·한명회·최항(崔恒)·강순(康純) 등이었다.
2) 성종 초의 원상
원상제가 가장 활발하게 운영되었던 때는 성종 초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섭정하는 기간이었다. 예종 때의 원상이 거의 그대로 성종 초로 이어졌다. 원상은 원임 의정, 시임 의정, 의정부 찬성 등으로 구성하였다. 이때의 원상들은 대체로 세조와 친밀한 관계에 있던 인물이었다. 한번 원상이 되면 죽을 때까지 유지하여 정원이 없었다. 새로이 의정이 되면 원상이 되었기 때문에 원상의 수는 10인 내외였다.
국정 전반에 걸쳐 왕의 자문에 응하면서 서무를 처리하던 원상은 1476년에 성종이 친정(親政)을 하면서 혁파되었다. 원상이 혁파되기 이전에도 원상을 없애자는 대간(臺諫)의 주장이 1472년 6월과 1475년에 각각 있었다. 그러다 정희왕후가 섭정을 그만두고 성종이 직접 정치를 하면서 1476년 5월에 혁파되었다[『성종실록』 7년 5월 15일].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왕이 서무를 직접 결재하는데 원상으로 대신을 수고로이 하는 것은 대신을 공경하는 도리가 아니라는 것인데, 결국 왕권을 강화하려는 데 그 의도가 있던 것이다.
3) 연산군 이후의 원상과 의례화
연산군 때에는 즉위 초에 성종의 유교(遺敎)로 원상을 설치하여 11개월간 유지하였다. 중종이 반정한 뒤에도 원상을 설치하였으나 활동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2년 가까이 유지되었다. 인종 때에도 원상이 설치되었으나 언제 그만두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린 나이로 즉위한 명종의 경우는 즉위 초에 원상을 설치하였다가 2년 7개월 만에 혁파하였다.
선조 이후 원상의 설치와 운영은 의례화되어, 고종 초까지 운영되었다. 숙종 초에는 공제하는 날이니 원상을 마땅히 혁파해야 한다는 기사가 나온다. 대체로 삼의정이 원상을 맡아 국장 기간을 관리하고 왕이 상복을 벗으면 원상을 없애는 것을 관례로 여겼던 것이다[『숙종실록』 즉위년 9월 14일]. 그러나 실제는 당시의 사정에 따라 달라서 원상을 없애는 시기가 일정하지는 않았다. 원상이 운영되는 동안 승정원은 원상의 근무처가 되는데, 승정원에서 모였을 때 원상이 도승지의 자리에 앉고 도승지는 동쪽에 자리한다.